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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33. 4. 24, 나사우 딜렌부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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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84. 7. 10, 홀란트 델프트 |
국적 | 네덜란드 |
요약
네덜란드의 초대 세습 '스타드호우데르'(총독).
(영). WilliamⅠ. 정식이름은 Prins van Oranje Willem, Graaf van Nassau. 별칭은 침묵공 빌렘(Willem de Zwijger).
스페인의 지배와 가톨릭 영향력에 저항한 네덜란드 반란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초기생애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빌렘의 큰아들로 태어난 그는 교양 있는 루터교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부친이 선조로부터 상속받은 란 강 유역의 소유지보다 1404년 이후 가문 내의 다른 분가가 브라반트와 저지대 지방(지금의 베넬룩스 3국)에서 획득한 토지들이 훨씬 많았다. 당시 이들 영토의 중심지는 브레다였다. 빌렘이 태어났을 때 브라반트 분가는 그의 큰아버지 앙리와 외아들 르네가 대표하고 있었다. 르네는 1530년 외삼촌으로부터 샬롱아를레 가문의 영토를 상속받았으며 그에 따라 프랑슈콩트의 영주와 오라녜의 프로방스 공국 지배자가 되었다. 오라녜의 르네가 1544년 살해당함으로써 나사우브레다 가문과 샬롱오라녜 가문의 재산들이 모두 르네의 사촌인 빌렘에게 상속되었는데 당시 빌렘의 나이는 11세였다. 이러한 재산상속이 지니는 중요성 때문에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의 영주였던 합스부르크가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는 빌렘의 부모에게 빌렘의 보호자 자격을 포기하도록 하고 빌렘이 새로운 조국에서 가톨릭 신앙으로 교육받도록 힘썼다. 따라서 빌렘은 신분에 어울리는 개인교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브레다와 브뤼셀에서 인격 형성기를 지냈으며 또한 당연히 지위에 걸맞는 신념이 몸에 배게 되었다. 프랑스어가 그의 일상언어가 되었으며 네덜란드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엄청난 토지를 보유했음에도 그의 재정상황은 여유가 없었다. 유동자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계속 어려움을 겪었으며 부유한 상속녀인 에그몬트 뷔렌 여백작 안나와 결혼한 후에도 이러한 곤경은 계속되었다. 한편 이 결혼으로 그는 주로 홀란트에 있는 몇몇 남작령을 얻게 되었다. 그의 이와 같은 경제적 어려움은 그와 같은 부류의 많은 사람이나 부르고뉴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카를 5세와 브뤼셀 왕실로부터 총애를 받던 빌렘은 자신에게 기대되던 사회상·군사상·외교상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카를 5세의 아들로 스페인 왕과 부르고뉴 자치령의 군주 자리를 계승한 펠리페 2세 치세에도 이같은 일을 계속해나갔다. 나중에 그와 적이 되는 아라스 주교 앙투안 페르노 드 그랑벨 및 알바 공작과 함께 카토-캉브레지 조약(1559)의 협상자로 활동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은 부르고뉴를 다스리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사이의 오랜 분쟁을 종식시킨 것으로 이로써 빌렘의 오라녜 공령은 프랑스의 점령에서 벗어났으며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의 칼뱅주의 설교사들로부터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555년 즉위한 펠리페 2세는 빌렘을 국무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으며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그를 홀란트와 젤란트 및 위트레흐트의 총독에 임명하고(1559. 8) 그후에는 프랑슈콩트의 총독에 봉했다(1561. 2).
중기생애
스페인 정부에 대한 저항
빌렘은 정부 내에서 정당한 몫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던 여러 대영주들과 함께 1561년경부터 브뤼셀 정부의 처사를 공공연하게 반대하기 시작했다.
브뤼셀 정부에서는 섭정인 파르마 공작부인 마르가리타의 영향력 있는 조언자였던 그랑벨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저항을 하게 된 원인 가운데 당초의 종교적인 문제가 그리 큰 것은 아니었으나 프로테스탄트 사상이 확산되는 한편 엄격한 가톨릭의 정통주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펠리페 2세의 확고한 결의 때문에 종교가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다.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던 빌렘과 제휴세력들은 종교문제에 있어서 국민들의 대다수와 입장이 같았는데, 이들은 관습적으로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종교 박해에 대해서는 분개하고 있었다. 게다가 빌렘과 마찬가지로 7, 8명의 귀족들은 자기 부모와 친구가 프로테스탄트인 경우도 있었다. 1558년 아내를 잃은 빌렘은 1561년 8월 25일 작센의 안나와 재혼함으로써 자신이 신봉하던 루터교 및 독일과의 관계를 굳히게 되었다.
빌렘의 마음 속에서는 점차로 종교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자리잡았다.
국무회의에서의 연설을 통해 빌렘은 종교통일은 실현불가능하며 군주가 백성들의 양심을 지배하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1565년 10월 펠리페 2세는 이단처벌 법령을 예외없이 시행하라는 단호한 명령을 내렸고 상황은 점점 더 위기국면으로 치달았다. 펠리페 2세에 맞선 세력에서는 하급귀족과 젠트리들이 주도권을 장악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칼뱅주의자였다. 이들은 유력자들보다도 더욱 극단적으로서 폭력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이들과 그 추종세력들은 곧 '거지들'(Gueux)로 불리게 되었다. 대영주들은 냉담한 태도를 보였으나 빌렘과 몇몇 인물들은 이 운동에 공감했다. 빌렘은 나사우 백작이며 칼뱅주의 학문을 갖춘 루터교도인 동생 나사우의 로데웨이크를 통해 개인적으로 이 운동에 관여했다. 빌렘은 무장행동을 취하지 말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부당한 칙령의 시행을 유예하도록 섭정인 마르가리타에게 청원하라고 저항세력을 설득했다.
그러나 실제 마르가리타가 칙령들을 다소 완화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분쟁을 피하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경제적 침체에서 오는 빈곤은 1566년 8월 저지대 지역을 뒤흔들어 광신종교로 하여금 맹렬하게 광란하도록 했다. 칼뱅주의 폭도들은 함부로 교회에 침범해 성상을 부수고 시설을 파괴했다.
회복불능의 피해를 입힌 것 외에도 이들의 지나친 행동은 3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평화공존은 더욱 어려워졌다. 둘째, 스페인 지배에 반대하는 세력의 책임 있는 인사들이 교회 수호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반대운동은 힘을 잃어갔다. 셋째, 펠리페 2세는 무력으로 이교와 반란을 단번에 분쇄하려 시도하게 되었다. 1566년 12월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작을 네덜란드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빌렘은 즉시 능동적인 저항을 펴려고 한 듯하나 에흐몬트 백작이자 플랑드르와 아르투아 총독인 인민의 영웅 라모랄이 그를 지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이제 공공연한 반란세력이 된 프로테스탄트는 빌렘을 그들의 수호자로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공공의 질서를 존중했다. 세습 안트웨르펜 자작의 자격으로 안트웨르펜에서 발생한 칼뱅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도시 성문을 폐쇄하고 반란세력과 정부군의 입성을 막았다. 그는 펠리페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펠리페 2세가 모든 관리들에게 새로이 요구한 무조건적인 복종 서약은 거절했으며 신중히 생각한 끝에 1567년 4월 딜렌부르크에 있는 가문의 영지에 칩거했다.
수천 명이 빌렘의 행동을 따르거나 영국이나 독일·프랑스로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란과 칼뱅주의와의 제휴
1567년 5월 모든 곳에서 질서가 회복되었으나 8월에 알바 공작은 잘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브뤼셀에 입성해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9월에는 특별법정인 분쟁재판소가 설치되어 반란과 이단에 관한 모든 재판을 진행했으며 1,0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그 가운데는 에흐몬트 백작과 호르네 백작도 포함됨). 법정에 소환된 빌렘은 위엄있는 태도로 자신을 변론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의 영토에 있는 그의 소유지는 몰수되었으며 루뱅에서 공부하던 그의 아들 필립스 빌렘은 스페인으로 추방당했다.
이제는 종교보다 자유가 더 시급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은밀하게나마 스페인의 지배를 반대하는 기운이 전보다 더 널리 확산되었고 빌렘은 자신이 네덜란드 주민의 해방자로 일어서기만 하면 일제히 봉기가 일어나리라 기대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과 네덜란드의 운명을 동일시하여 군사행동을 취하는 데 더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루터교를 신봉하는 독일의 제후들과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실질적으로 지원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실망으로 그쳤으나 주로 친척들의 도움으로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1568년 4월 저지대 지역에 대한 2차례의 침공이 시작되었으나 둘 다 참패로 끝났다.
한쪽의 병력은 엠스 강둑에서 알바 공작에 의해 섬멸당했다. 빌렘 자신은 10월초 전투에 참가해 브라반트로 진격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는 프랑스로 퇴각해야만 했다. 빌렘은 당시 프랑스 왕정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칼뱅주의자들인 위그노파와 잠시 동안 같이 지내다가 그의 개인대표로서 로데웨이크 백작을 남겨두고 1569년 10월 독일로 돌아왔다.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적어도 빌렘의 이름을 억압에 저항하는 기수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칼뱅주의자들은 1566년 당시 빌렘이 자신들을 무력 지원하지 않았던 것을 기꺼이 용서했으며 빌렘 역시 칼뱅주의자들의 청교도 기질과 편협함을 싫어했지만 그들이 저항운동의 핵심세력인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에 따라 관계개선이 이루어졌으나 빌렘이 개혁교회에 합류한 것은 1573년이 되어서였다.
이 시기는 빌렘에게 가장 암울한 때였다.
알바 공작이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빌렘 자신의 구상은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어 동생(아돌프)과 많은 친구들을 잃은 데다 아들까지 빼앗겼다. 영지와 관직도 잃었으며, 재정적 곤란과 함께 아내인 안나마저 변덕스러운 행동으로 그를 괴롭혔다. 안나와는 1571년 이혼했다. 그의 공작은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군사작전은 주로 시 베거스의 영웅적인 활약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시 베거스는 해외기지에서 출동해 스페인군에 대응해 해전(海戰)만을 벌이던 존재였다.
이들의 해상봉쇄 활동은 네덜란드에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다주고 알바 공작의 가혹한 통치로 불만세력은 더욱 늘어났다. 이러한 사정은 해상활동을 위주로 하는 홀란트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1572년 여름 빌렘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여러 차례의 공격을 계획했다. 그런데 계획된 공식 공격이 있기 훨씬 전인 4월 1일 영국의 포구에서 출동한 시 베거스의 함대가 조이트홀란트에 있는 브릴레 항을 기습 점령했다. 이들의 성공은 홀란트와 젤란트에서 그토록 바라오던 대중봉기를 촉발시켰으며 대부분의 도시가 빌렘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따라서 7월 무렵에는 암스테르담과 미델부르크를 비롯해 젤란트의 다른 두 도시만이 스페인 국왕의 수중에 있었다. 빌렘의 발의로 홀란트 주의회가 7월 19~23일 도르드레흐트에서 열렸다. 의회는 빌렘이 여전히 왕을 대신하는 자신들의 명목상 총독임을 인정하고 자신들은 정부에서의 실질적인 역할을 떠맡았다. 모든 주의 합동의회격인 스타텐헤네랄(전국회의)에서의 결정을 앞두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동등한 권리가 천명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헬더란트와 프리슬란트의 대부분 지역이 봉기에 동참했으며 알바 공작의 군대는 프랑스에서 시작된 주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남부로 후퇴했다. 나사우의 로데웨이크는 몽스를 장악하고 스페인군의 포위공격에 맞서고 있었다. 빌렘은 브라반트로 진군했으며 몇몇 도시들은 그에게 성문을 개방했다. 그런데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사건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위그노의 영향력이 분쇄됨에 따라 프랑스로부터 지원 희망이 사라졌다.
9월에 로데웨이크는 조건부 항복을 했고 빌렘은 자신이 지휘하던 용병들을 해산했다. 남부지방에서 거둔 전과로, 반란을 일으킨 북부의 2개 주는 자리를 잡아나갈 여유를 얻었다. 빌렘은 북부지역 2개 주에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10월 21일 엥크호이젠에 상륙했다.
영웅적인 활약을 하게 되는 4년간(1572~76) 오라녜 공 빌렘은 바다에 면한 2개 주의 반란진압을 위해 파견된 스페인군에 맞서 필사적인 저항을 주도했다.
아돌프에 이어 2명의 동생, 로데웨이크와 헨리크가 1574년 4월 네이메헨 근처에서 스페인군에 크게 패해 전사했다. 한편 정복한 주와 잉글랜드 및 독일, 프랑스에서 빌렘의 대리인들은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1575년 6월 12일 빌렘은 개혁교회 편으로 한때 수녀원장을 지낸 부르봉몽팡시에의 샤를로트와 재혼했다. 추종세력들이 단합하여 분파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빌렘은 온갖 권위와 전술 및 불굴의 결의를 겸비해야만 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과도한 점을 견제하고 편협성을 누그러뜨리고자 했으나 예전에 그가 주장했던 것과 같이 가톨릭과 개혁교회를 평등하게 유지시킬 수는 없었다. 1573년 가톨릭 미사가 금지되었다. 빌렘은 1575년 7월 홀란트의 여러 지역간을, 그리고 1576년 4월 홀란트와 젤란트를 서로 좀더 긴밀한 단일체로 결합시켰으며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최고 권위자'(Chief and Supreme Authority)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미사의 자유는 확실히 금지되었지만 신앙의 자유는 인정되었다.
후기생애
승리
1576년 저지대 지역에서 스페인의 권력이 일시적으로 붕괴되자 빌렘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알바의 후계자인 루이스 데 레케센스 이 수니가의 죽음으로 총독 자리가 비고, 스페인 병사들이 위계질서에 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주의회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국회의를 소집했다. 스페인 국왕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자처하면서도 사실은 국왕대리자의 권력을 찬탈하고자 했던 전국회의는 곧 반란을 일으킨 주와 협상을 시작했으며, 그결과 겐트(헨트)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1576. 11. 8). 조약 체결에는 빌렘의 영향력과 그 대리인들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제1차 브뤼셀 동맹(1577. 1)에 의해 보완된 겐트 조약은 빌렘의 야심과 이상의 실현을 예고했다. 그의 총독직을 보증하고 소유지들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17개 주 네덜란드 연합이 곧 결성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착실히 성장하고 있던 '공동의 조국'이라는 개념은 배타주의적·종교적 분열을 극복할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1577년 전국회의가 신임총독인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과 체결한 영구칙령(Perpetual Edict)은 가톨릭이 모든 지역에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또 여기에는 겐트 조약의 존속을 위한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홀란트와 젤란트의 대표는 전국회의에서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1577년 7월 돈 후안은 새로이 적대감정을 불러일으키고자 했으며 그에 따라 좀더 많은 사람들이 빌렘을 지지하게 되었다.
항상 빌렘을 반대했던 홀란트와 젤란트의 여러 도시는 이제 빌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1578년 2월 마지막으로 암스테르담이 빌렘의 편에 가담했다. 위트레흐트 주에서도 이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며 플랑드르·브라반트·그로닝겐 및 이외 지역에서도 칼뱅주의 시민과 장인으로 이루어진 급진성향의 빌렘 추종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1577년 9월 홀란트와 젤란트 대표가 다시 참석하게 된 전국회의는 빌렘을 남부의 브뤼셀로 초청했으며 빌렘은 개선장군처럼 브뤼셀에 입성했다.
그의 영향력하에 새로운 연합국가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조국 공동의 적'에 맞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같이 행동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계속해서 최고권력을 행사하던 전국회의는 펠리페 2세의 조카인 어린 오스트리아 대공 마티아스를 수반으로 하는 새 정부를 구성했다. 마티아스는 입헌정부체제를 보장하는 빌렘의 조건에 동의했으며, 더욱이 1578년 1월 빌렘을 부사령관에 임명해 자신에게 봉사하도록 했다.
실패
빌렘은 이제 출세가도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각 주의 연합처럼 덧없는 것임이 입증되었다. 새로이 이룩한 통일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 실패한 주요원인은, 대중적이면서도 경직된 체제를 억지로 도입시킨 칼뱅주의자들의 지나친 성향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펠리페 2세가 새로 임명한 총독 알레한드로 파르네세에게 결과적으로 이로운 행동을 했다. 파르네세 총독은 옛 섭정인 마르가리타의 아들로서 돈 후안이 사망한 후 1578년 10월 1일 총독에 임명되었다.
프랑스어를 쓰는 남부의 각 주는 가톨릭을 신봉하면서도 여전히 스페인에 반발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도움이 필요할 경우 프랑스 쪽으로 기울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1578년 8월 전국회의가 프랑스 앙리 3세의 동생으로 가톨릭교도인 앙주 공작을 '네덜란드의 자유 수호자'로 삼게 된 것은 빌렘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후 곧 각 주의 소규모 집단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동맹체들이 전체 동맹을 형성하기 위해 타협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타협은 빌렘이 '위트레흐트 동맹'(헬더란트의 총독이자 강경 칼뱅주의자인 빌렘의 동생 얀이 주창했음)에 대해 조건부 지지를 보냈을 때인 1579년 5월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떨어졌다.
3월 15일 펠리페 2세는 빌렘에 대한 법의 보호를 박탈했으며 그의 목숨에 현상금을 걸었다. 빌렘은 자기의 궁정사제가 작성한 격렬한 내용의 〈해명 Apologie〉을 통해 자신에게 씌워진 반역혐의에 반박하는 한편 프랑스와 신뢰를 유지했다. 많은 프로테스탄트의 반대를 무릅쓰고 빌렘은 1580년 전국회의를 설득해 앙주 공작을 네덜란드의 세습 최고권력자로 만들었다. 1년 후 전국회의는 스페인 왕실과의 동맹관계를 정식으로 단절했다. 한편 앙주 공작에게 직접 통치권을 부여하기를 꺼렸던 홀란트와 젤란트는 빌렘을 자신들의 세습 백작으로 삼고자 계획했다.
그러나 자유라는 대의명분에 도움을 주기에는 거리가 멀었던 앙주 공작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빌렘은 매우 어렵게 전국회의와 화해했다. 그는 계속 프랑스에 의존했고, 1583년에는 살해당한 프랑스의 위그노 지도자 콜리니 백작의 딸 루이즈와 4번째로 결혼했다.
펠리페 2세가 선언한 빌렘에 대한 조치의 결과로 1582년 3월 안트웨르펜에서 빌렘을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남부에서부터 진군해오던 파르마 공작과 함께 빌렘은 1582년 7월 홀란트로 후퇴했고 이곳에서 과거 델프트 수도원이었던 자신의 낡은 숙영지로 옮겨갔다.
여기서 그는 가톨릭 광신자인 프랑 콩투아 발타자르 제라르에게 살해당했다(1584).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자신이 오랫동안 지휘하고자 힘썼던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다. 브레다에 있는 가문의 본거지는 당시 적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델프트의 뉴처치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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