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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흐몬트

다른 표기 언어 Lamoraal, graaf van Egm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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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22. 11. 18, 에노 라아메드
사망 1568. 6. 5, 브뤼셀
국적 네덜란드

요약 네덜란드의 귀족.
Egmond는 Egmont라고도 씀.

네덜란드에 대한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초기에 주도했다. 괴테의 희곡 〈에그몬트 Egmont〉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스페인의 종주권이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나 알바 공(公)의 탄압정치(1567~73) 아래서 처음으로 희생된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네덜란드의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1541년 홀란트 주에 있는 백작령을 물려받았고, 3년 후 짐메른의 팔라틴 백작(왕권의 행사가 일부 허용된 영주)인 얀 2세의 딸 바이에른 출신의 사비나와 결혼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신임받는 조언자였던 그는 황제의 아들인 펠리페 2세를 대신해 영국의 가톨릭교도 여왕 메리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생캉탱(1557)과 그라블린(1558)에서 프랑스군에게 승리를 거둔 것을 비롯해 군사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세웠다. 1559년 그는 플랑드르와 아르투아 지역의 총독으로 지명되었고, 섭정인 파르마 공작부인 마르가레테의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에흐몬트와 지도층 귀족들은 네덜란드의 특권과 종교적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고 앙투안 페르노 드 그랑벨 추기경을 실질적인 정부 수반의 위치에 올려놓으려는 펠리페 2세의 정책에 반대했다. 오라녜 공 빌렘, 호르네 백작 필립스 반 몽모랑시와 함께 펠리페 2세에게 청원을 해 1564년 그랑벨을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스페인까지 직접 가서 호소했는데도(1565) 펠리페 2세가 계속해서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가혹한 법적 제재를 가하자 그는 빌렘·호르네와 함께 1565년 11월 국정위원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군주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하급 귀족들이 1566년 마르가레테에게 종교의 자유를 더 확대해줄 것을 청원하기 위해 조직한 동맹에도 극히 제한적인 지지를 보냈을 뿐이었다. 그후 그는 플랑드르에 있는 영지로 내려가 칼뱅교도들의 봉기를 철저히 탄압했다.

1567년 알바 공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빌렘은 에흐몬트에게 자기와 함께 무장투쟁을 벌일 것을 간청했다. 에흐몬트가 이를 거절하자 난처해진 빌렘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게 지원을 하기 전에 몇 달 동안이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했다. 한편 그는 마르가레테의 요구에 따라 1567년 봄 충성서약을 했으며, 알바 공이 도착하게 되면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빌렘의 경고를 무시했다. 그는 1567년 9월 9일 알바에게 붙잡혀 고위 귀족들과 제후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역죄로 참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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