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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빌렘의 큰아들로 태어난 그는 교양 있는 루터교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부친이 선조로부터 상속받은 란 강 유역의 소유지보다 1404년 이후 가문 내의 다른 분가가 브라반트와 저지대 지방(지금의 베넬룩스 3국)에서 획득한 토지들이 훨씬 많았다. 당시 이들 영토의 중심지는 브레다였다. 빌렘이 태어났을 때 브라반트 분가는 그의 큰아버지 앙리와 외아들 르네가 대표하고 있었다. 르네는 1530년 외삼촌으로부터 샬롱아를레 가문의 영토를 상속받았으며 그에 따라 프랑슈콩트의 영주와 오라녜의 프로방스 공국 지배자가 되었다. 오라녜의 르네가 1544년 살해당함으로써 나사우브레다 가문과 샬롱오라녜 가문의 재산들이 모두 르네의 사촌인 빌렘에게 상속되었는데 당시 빌렘의 나이는 11세였다. 이러한 재산상속이 지니는 중요성 때문에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의 영주였던 합스부르크가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는 빌렘의 부모에게 빌렘의 보호자 자격을 포기하도록 하고 빌렘이 새로운 조국에서 가톨릭 신앙으로 교육받도록 힘썼다. 따라서 빌렘은 신분에 어울리는 개인교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브레다와 브뤼셀에서 인격 형성기를 지냈으며 또한 당연히 지위에 걸맞는 신념이 몸에 배게 되었다. 프랑스어가 그의 일상언어가 되었으며 네덜란드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엄청난 토지를 보유했음에도 그의 재정상황은 여유가 없었다. 유동자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계속 어려움을 겪었으며 부유한 상속녀인 에그몬트 뷔렌 여백작 안나와 결혼한 후에도 이러한 곤경은 계속되었다. 한편 이 결혼으로 그는 주로 홀란트에 있는 몇몇 남작령을 얻게 되었다. 그의 이와 같은 경제적 어려움은 그와 같은 부류의 많은 사람이나 부르고뉴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카를 5세와 브뤼셀 왕실로부터 총애를 받던 빌렘은 자신에게 기대되던 사회상·군사상·외교상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카를 5세의 아들로 스페인 왕과 부르고뉴 자치령의 군주 자리를 계승한 펠리페 2세 치세에도 이같은 일을 계속해나갔다. 나중에 그와 적이 되는 아라스 주교 앙투안 페르노 드 그랑벨 및 알바 공작과 함께 카토-캉브레지 조약(1559)의 협상자로 활동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은 부르고뉴를 다스리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사이의 오랜 분쟁을 종식시킨 것으로 이로써 빌렘의 오라녜 공령은 프랑스의 점령에서 벗어났으며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의 칼뱅주의 설교사들로부터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555년 즉위한 펠리페 2세는 빌렘을 국무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으며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그를 홀란트와 젤란트 및 위트레흐트의 총독에 임명하고(1559. 8) 그후에는 프랑슈콩트의 총독에 봉했다(156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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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빌렘 1세의 초기생애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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