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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렘 1세의 후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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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1576년 저지대 지역에서 스페인의 권력이 일시적으로 붕괴되자 빌렘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알바의 후계자인 루이스 데 레케센스 이 수니가의 죽음으로 총독 자리가 비고, 스페인 병사들이 위계질서에 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주의회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국회의를 소집했다. 스페인 국왕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자처하면서도 사실은 국왕대리자의 권력을 찬탈하고자 했던 전국회의는 곧 반란을 일으킨 주와 협상을 시작했으며, 그결과 겐트(헨트)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1576. 11. 8). 조약 체결에는 빌렘의 영향력과 그 대리인들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제1차 브뤼셀 동맹(1577. 1)에 의해 보완된 겐트 조약은 빌렘의 야심과 이상의 실현을 예고했다. 그의 총독직을 보증하고 소유지들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17개 주 네덜란드 연합이 곧 결성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착실히 성장하고 있던 '공동의 조국'이라는 개념은 배타주의적·종교적 분열을 극복할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1577년 전국회의가 신임총독인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과 체결한 영구칙령(Perpetual Edict)은 가톨릭이 모든 지역에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또 여기에는 겐트 조약의 존속을 위한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홀란트와 젤란트의 대표는 전국회의에서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1577년 7월 돈 후안은 새로이 적대감정을 불러일으키고자 했으며 그에 따라 좀더 많은 사람들이 빌렘을 지지하게 되었다.

항상 빌렘을 반대했던 홀란트와 젤란트의 여러 도시는 이제 빌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1578년 2월 마지막으로 암스테르담이 빌렘의 편에 가담했다. 위트레흐트 주에서도 이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며 플랑드르·브라반트·그로닝겐 및 이외 지역에서도 칼뱅주의 시민과 장인으로 이루어진 급진성향의 빌렘 추종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1577년 9월 홀란트와 젤란트 대표가 다시 참석하게 된 전국회의는 빌렘을 남부의 브뤼셀로 초청했으며 빌렘은 개선장군처럼 브뤼셀에 입성했다.

그의 영향력하에 새로운 연합국가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조국 공동의 적'에 맞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같이 행동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계속해서 최고권력을 행사하던 전국회의는 펠리페 2세의 조카인 어린 오스트리아 대공 마티아스를 수반으로 하는 새 정부를 구성했다. 마티아스는 입헌정부체제를 보장하는 빌렘의 조건에 동의했으며, 더욱이 1578년 1월 빌렘을 부사령관에 임명해 자신에게 봉사하도록 했다.

실패

빌렘은 이제 출세가도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각 주의 연합처럼 덧없는 것임이 입증되었다. 새로이 이룩한 통일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 실패한 주요원인은, 대중적이면서도 경직된 체제를 억지로 도입시킨 칼뱅주의자들의 지나친 성향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펠리페 2세가 새로 임명한 총독 알레한드로 파르네세에게 결과적으로 이로운 행동을 했다. 파르네세 총독은 옛 섭정인 마르가리타의 아들로서 돈 후안이 사망한 후 1578년 10월 1일 총독에 임명되었다.

프랑스어를 쓰는 남부의 각 주는 가톨릭을 신봉하면서도 여전히 스페인에 반발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도움이 필요할 경우 프랑스 쪽으로 기울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1578년 8월 전국회의가 프랑스 앙리 3세의 동생으로 가톨릭교도인 앙주 공작을 '네덜란드의 자유 수호자'로 삼게 된 것은 빌렘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후 곧 각 주의 소규모 집단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동맹체들이 전체 동맹을 형성하기 위해 타협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타협은 빌렘이 '위트레흐트 동맹'(헬더란트의 총독이자 강경 칼뱅주의자인 빌렘의 동생 얀이 주창했음)에 대해 조건부 지지를 보냈을 때인 1579년 5월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떨어졌다.

3월 15일 펠리페 2세는 빌렘에 대한 법의 보호를 박탈했으며 그의 목숨에 현상금을 걸었다. 빌렘은 자기의 궁정사제가 작성한 격렬한 내용의 〈해명 Apologie〉을 통해 자신에게 씌워진 반역혐의에 반박하는 한편 프랑스와 신뢰를 유지했다. 많은 프로테스탄트의 반대를 무릅쓰고 빌렘은 1580년 전국회의를 설득해 앙주 공작을 네덜란드의 세습 최고권력자로 만들었다. 1년 후 전국회의는 스페인 왕실과의 동맹관계를 정식으로 단절했다. 한편 앙주 공작에게 직접 통치권을 부여하기를 꺼렸던 홀란트와 젤란트는 빌렘을 자신들의 세습 백작으로 삼고자 계획했다.

그러나 자유라는 대의명분에 도움을 주기에는 거리가 멀었던 앙주 공작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빌렘은 매우 어렵게 전국회의와 화해했다. 그는 계속 프랑스에 의존했고, 1583년에는 살해당한 프랑스의 위그노 지도자 콜리니 백작의 딸 루이즈와 4번째로 결혼했다.

펠리페 2세가 선언한 빌렘에 대한 조치의 결과로 1582년 3월 안트웨르펜에서 빌렘을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남부에서부터 진군해오던 파르마 공작과 함께 빌렘은 1582년 7월 홀란트로 후퇴했고 이곳에서 과거 델프트 수도원이었던 자신의 낡은 숙영지로 옮겨갔다.

여기서 그는 가톨릭 광신자인 프랑 콩투아 발타자르 제라르에게 살해당했다(1584).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자신이 오랫동안 지휘하고자 힘썼던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다. 브레다에 있는 가문의 본거지는 당시 적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델프트의 뉴처치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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