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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00경, 샹파뉴 트루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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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264. 10. 2, 교황령 페루자 |
국적 | 바티칸시티 |
요약
교황(1261~64 재위).
(영). Urban Ⅳ. 본명은 Jacques Pantalon.
보잘것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리옹의 사제, 그 다음에는 파리대학교의 교회법 교수를 지낸 뒤, 1253년 베르됭의 주교가 되었다. 2년 뒤 교황 알렉산데르 4세로부터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임명받았고, 1261년 8월 29일에는 그를 계승하여 교황이 되었다. 교황이 된 다음에는 2가지 과제에 부딪쳤는데, 첫째는 교황청의 봉토인 시칠리아 왕국을 호엔슈타우펜가(家)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었고, 2번째는 이탈리아에서 전임교황 알렉산데르가 시칠리아 문제로 흔들리는 바람에 약화되었던 교황의 영향력을 되찾는 일이었다.
1263년 우르바노는 이미 죽은 호엔슈타우펜가 출신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서자 만프레디의 왕위계승권 주장을 무시하고서, 프랑스의 왕 성 루이 9세의 유능하고 야심을 가진 동생인 앙주의 샤를에게 시칠리아의 왕관을 씌워주겠다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이 때까지 우르바노는 만프레디의 권력과 토스카나 및 롬바르디아의 기벨린당(교황에 반대하고 황제를 지지한 정당)의 출현을 교회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해왔다.
그 후 루이와 여러 차례에 걸쳐 협상을 벌였으나 결과가 좋지 않아 만프레디와 기벨린당 모두에게 협박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르바노 암살 음모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자 교황은 페루자로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는 샤를이 도착하기 전에 시칠리아 문제를 후임 교황들의 골칫거리로 남겨둔 채 죽고 말았다. 우르바노는 1264년의 칙서로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을 기념하는 축일인 '성체성혈대축일'을 지킬 것을 모든 교회에 명령했다(이 축일은 삼위일체 주일 다음 목요일에 지킴).
그가 일찍 죽는 바람에 대부분의 나라는 이 명령을 무시해오다가 1311~12년에 열린 빈 공의회에서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재가한 뒤 지키게 되었다. 1901~30년에 J. 지로가 편집한 〈1261~64년의 우르바노 4세 Les Registres d'Urbain Ⅳ, 1261~1264〉(2권)가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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