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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삼국시대 고대국가 중의 하나인 백제의 건축·조각·회화·공예 미술.
백제는 서기 전후 무렵에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 유민에 의해 한강변에 세워진 백제라는 부족국가를 기반으로 발전한 나라이다. 백제미술에서 고구려와 연관성이 강하게 보이는 것은 이러한 민족적 배경 때문이다.
백제는 수도를 3번 옮겼는데, 일반적으로 그 수도의 명칭에 따라 한성시대(3세기 중엽~475), 웅진시대(475~538), 사비시대(538~660)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구분은 미술사에서 그대로 사용되며, 백제의 유적·유물 절대연대 추정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초기의 수도인 한성, 즉 위례성은 경기도 광주시 경안 부근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풍납동토성, 몽촌토성, 석촌동고분군 등은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384년(침류왕 1)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삼한 이래의 부족적 전통을 극복해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확립했으며, 미술분야도 보다 풍부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한성시대의 유물은 적은 편으로 1925년 한강홍수 때 풍납동 토성 안에서 발견된 청동 초두 2점은 가장 귀중한 예이고, 1959년 뚝섬에서 발견된 금동불좌상은 백제의 제작으로 확증하기는 어렵지만 5세기 전반의 불상 양식을 띠고 있어 우리나라 불교전래 초기 양상을 잘 보여준다.
475년 백제는 계속되는 고구려의 압력을 피해 수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겼으며 무령왕대에 이르러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호화롭고 풍부한 껴묻거리들은 이러한 왕권의 신장과 국력의 안정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538년에 수도를 다시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겼는데, 이 사비시대에 모든 제도가 정비되고 불교 및 문화가 크게 발전·융성했다.
백제는 중국의 동진과의 관계 이후 북조보다는 남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문화의 수준을 높였고, 일본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552년(성왕 30, 일설에는 538) 일본에 불교를 전한 이후에는 승려와 예술가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불교문화 융성에 크게 기여했다. 이와 같은 백제의 대외관계는 백제문화의 성격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의 유물이 보다 풍부하게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서 백제미술의 특징을 계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백제의 건축
백제의 건축은 대규모의 왕궁과 절이 여러 곳에 조영되어 많은 유적이 발견되고 있으나, 건물지의 초석이나 석탑을 제외하고는 현존하는 것이 없다.
백제 초기의 목조건축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강직한 형태를 보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중국 남조와의 교류 이후에는 다소 경쾌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특징은 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일본의 고대 건축물인 호류 사[法隆寺]의 금당이나 5층목탑, 그리고 같은 절에 소장되어 있는 다마무시즈시[玉蟲廚子] 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백제는 중국 남조의 여러 나라와 교류가 빈번했는데, 특히 양(梁)과의 긴밀한 교섭은 백제 무령왕릉의 전축분(塼築墳) 구조나 문양전, 그리고 양나라의 동전이나 강남의 고월자(古越磁) 등 남조계통의 유물이 여러 점 출토되는 것에서도 입증된다. 사지로는 부여의 군수리사지·정림사지(定林寺址)·금강사지, 익산의 미륵사지 등이 대표적인데 이를 통해 백제의 전형적인 가람배치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중심축선상에 배치되고 중문에서 좌우로 펼쳐진 회랑이 당탑을 둘러싸 강당에 연결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미륵사지의 가람배치는 특이해 사역(寺域)을 3원(三院)으로 나누고, 각각의 원에는 독립적인 탑과 금당이 있었는데 중앙탑은 목조이고 좌우의 탑은 석조로 지금은 왼쪽 석탑의 일부만 남아 있다. 탑은 부여 부근의 일부 사지에 목탑이 세워졌던 것이 조사 결과 확인되었으며 탑지(塔址)의 기단부에서 납석제와 금동불상이 발견된 군수리사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탑은 모두 석탑이며, 익산의 미륵사지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탑은 목탑의 구조를 충실히 재현한 것으로 한국 석탑의 시원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백제의 석탑은 옥개석이 길고 넓은 평판석으로 되어 있고 그 끝이 반전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석탑 양식은 이후 백제지역에서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계속 이어졌다.
백제의 조각
백제의 조각은 불교조각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석조 진묘수는 능묘조각의 유일한 예이다.
384년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전파한 직후 절이 세워지고 예배대상으로 불상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존하는 백제의 불상 가운데 6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확실한 예는 없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것으로 연대가 가장 오래된 뚝섬출토금동불좌상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초기 불상의 형태를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상은 사자가 양쪽에 표현되어 있는 네모난 대좌 위에 두 손을 앞에 모아 선정인을 한 불상으로 5세기 전반의 중국 불상 양식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후 6세기 백제불상은 양식적으로 다소 진전된 모습을 보이지만 규암면 신리 출토 금동불좌상과 부여 군수리 출토 납석제불좌상 등에서 같은 형식이 보이므로 초기에 이와 같은 불상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들 중에는 일광삼존불 계통의 상이 많이 있는데 보원사지 출토 금동불입상, 정림사지 출토 납석제삼존불상, 정지원명 금동삼존불상, 군수리사지 출토 금동보살입상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 상들은 고구려를 통한 중국 북조 양식의 영향을 상당히 보이면서도 백제 양식의 부드럽고 정적인 분위기가 가미된 상들이다.
6세기말과 7세기초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마애불의 출현인데 예산의 4면석불, 태안의 마애삼존불, 서산의 마애삼존불 등은 대표적인 예로서 백제 특유의 독자적인 양식과 구도를 잘 보여준다. 특히 서산마애삼존불은 백제불상 가운데 대표적인 걸작으로 밝게 웃고 있는 미소는 '백제의 미소'라고 불린다. 이 삼존불의 좌협시상은 반가사유보살상이고, 우협시상은 보주를 두 손에 마주잡은 관음보살입상으로 특이한 구성을 보여주는데, 이 두 보살상은 각기 삼국시대에 유행한 보살상 형식이다.
그중 보주를 두 손에 들고 있는 보살입상은 삼국 중 특히 백제에서 유행된 것으로 이외에도 태안마애삼존불의 가운데에 있는 보살상, 부여 규암면 신리 출토의 금동보살상, 정림사지 출토의 소조보살상 파편 등 10여 구가 있다. 한편 이 봉보주 보살상의 원류는 중국 남조의 불상들에서 발견되는데, 사천성 성도의 만불사지에서 출토된 양나라의 불비상은 이와 비교된다. 그리고 일본의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에도 이 봉보주형 보살상이 유행했으므로 이는 중국의 남조, 삼국시대의 백제, 일본의 아스카 시대로 이어져 역사상의 밀접한 관련을 확인시켜주는 실제 유물이다.
7세기 이후의 불상으로는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 부여 규암면 출토 금동보살상 2구, 공주 의당 출토 금동보살입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불상들은 북제·북주 후기 내지는 수·당초의 양식이 보이면서 완숙한 백제조각의 진전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보살상의 경우 유연한 삼굴 자세에 장식적인 높은 보관과 화려한 영락장식을 하고 있어 새로운 표현요소를 보여준다.
백제의 회화
백제의 회화는 남아 있는 자료가 적어 파악이 어렵지만 다른 미술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중국 남조와의 교섭 속에서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공주 송산리 6호분이나 부여 능산리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연화문·비운문 등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능산리고분의 백호도는 고구려 사신도에 비해 역동적인 표현은 떨어지지만 백제다운 유연성이 엿보인다.
남조와의 회화교섭은 역시 남조 문물의 영향이 뚜렷이 보이는 무령왕릉 출토의 왕비 두침(頭枕)과 족좌(足座)에 그려진 칠기 그림에서 확인된다. 특히 두침에 그려진 연꽃에서 탄생하는 비천의 표현은 남조 특유의 표현으로 북위의 룽먼[龍門] 석굴에서도 발견되어 주변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외의 백제 회화자료로는 무령왕릉 출토 은탁잔 뚜껑의 산악문양이나 부여 출토로 전해오는 납석제 불보살병립상(佛菩薩竝立像)의 뒷면에 부조된 산악표현, 그리고 부여 규암면의 절터에서 출토된 산수문전(山水紋塼) 등을 들 수 있다(→ 산수문전).
특히 납석제 불상의 뒷면에 부조된 산악도와 산수문전은 백제 후기 산수표현의 진수를 보여준다. 불상의 뒷면에 부조된 산악도는 4겹으로 중첩된 봉우리 그림으로 산의 깊이감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산수문전은 도안적이지만 그 형식은 얕은 부조의 삼산형(三山形) 토산과 암산을 고원법으로 배치하고 근경에 수면·누각·도승을 묘사하는 등 산수화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이는 고구려 강서대묘의 산악도, 진파리 1호분의 수목도·산악도 등과 더불어 삼국시대 후기 산수화의 수준을 알려주는 좋은 예이다. 한편 백제의 화공으로 588, 597년에 각각 일본에 건너간 백가(白伽)·아좌태자(阿左太子) 등은 일본 고대회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의 금속공예
백제의 금속공예가 서울특별시 풍납동토성에서 나온 초두뿐일 때는 그 수준을 추정하기 어려웠으나 1971년 공주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왕과 왕비의 금제 관식 1쌍, 은제과대, 은제신발 2쌍, 귀걸이, 목걸이, 팔찌, 청동거울 등이 출토됨에 따라 다소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금제 관식은 인동당초무늬를 주된 문양으로 하는 투각제품으로 왕의 것은 문양의 곡선이 자유롭고 영락이 달려 있으나, 왕비의 것은 좌우대칭으로 정제되어 있고 가운데 병 모양의 투각문 아래에 특색 있는 연꽃무늬가 있어 중국 남조미술의 영향이 보인다. 왕의 은제과대는 타원형 과판을 교대로 직접 연결시킨 것으로 지금까지 유례가 없는 형식이다.
은팔찌는 2마리 용을 부각한 것으로 안쪽에 제작명이 음각되어 있어 경자년(520년으로 추정)에 다리(多利)라는 사람이 만들었음이 밝혀졌다. 방격규거신수문경(方格規矩神獸紋鏡)은 명문대를 갖는 전형적인 중국 후한대의 거울에 4마리의 짐승과 한 인물을 양각으로 덧붙인 것이다. 한편 나주 반남면(潘南面)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반타원형의 내모(內帽)에 수목형(樹木形) 입식을 사면에 세운 것으로, 신라 가야지구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관련성을 보인다.
백제에서 일본에 전해준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에는 은상감 명문이 있어 고대 한일관계 연구에 중요할 뿐만 아니라 상감기법이 삼국시대에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 이상으로 백제미술은 각 분야에 걸쳐 매우 정제되고 세련된 조형성을 보여주면서도 부드럽고 정적이며 따뜻한 인간적 분위기를 그 미적 특성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백제미술이 고구려와 중국 남조와의 교류에 바탕을 두면서도 독자적인 미감을 반영한 결과이며, 이후 신라와 일본의 고대미술 발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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