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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건국은 중국민족 독립의 회복임과 동시에 그 문화의 회복이었다.
유목적인 풍속과 문화가 금지되고 한족의 그것이 복원되었다. 따라서 유교주의를 내세운 태조를 이은 영락제는 칙명으로 〈오경대전〉·〈사서대전〉·〈성리대전〉 등을 편찬·간행하여 과거의 표준으로 삼고, 〈영락대전〉을 편찬해서 유교주의를 강조했다. 그런데 명초에는 주자학 이외의 사상은 탄압을 받아 전제군주체제에 맞지 않는 〈맹자〉의 학습을 대학에서 금지할 정도로 사상통제가 심했다. 이에 따라 과거의 형식도 팔고문(八股文)으로 고정되었고, 학술상의 새로운 경지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왕수인(王守仁)의 양명학설이 대두해 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 또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해서 당시의 주자학에 도전했다. 말기에 들어 양명학도 대체로 쇠퇴한 주자학과 같이 허학화하게 되자, 이에 대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이 발흥했다. 이는 청대 고증학 발전의 밑바탕이 되었다.
명대 중·후기부터 서민들도 생활이 풍요롭게 되면서, 이전에는 사대부층에게만 독점되었던 문화적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송·원 이래 차츰 발달된 연극·소설 등의 통속문화가 유행했다. 소설로서 4대 기서(奇書)라고 불리는 〈삼국지연의〉·〈수호전〉·〈서유기〉·〈금병매〉와 〈봉신연의〉 등이 이무렵 완성되고, 기전적(奇傳的)인 남곡(南曲)이 잡극(雜劇)의 북곡(北曲)을 누르고 성행했다(중국문학). 이 연극·소설은 민중의 예술로 발달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두 계급의 혼합문화의 경향을 이루었다.
건축은 전대와 비교해 커다란 변화는 없지만 도성·궁궐·절·도관(道觀)·능묘 등의 규모가 커지고, 화려한 것이 많다. 15세기에 영락제가 베이징에 지은 쯔진청[紫禁城]의 우먼[午門]·타이먀오[太廟]·톈탄[天壇] 등을 보면 제국의 힘을 상징하듯 규모가 크지만 건축미에서는 송대 이후 퇴조된 양상을 보여준다.
이외에 베이징의 창핑 구[昌平區]에 있는 영락제 이하 13명의 황제능묘인 스싼링[十三陵]에서도 그 면모를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절의 규모와 탑파(塔婆)는 일반적으로 작아진다. 공예를 대표하는 도자기는 원대 이전의 청자·백자·천목(天目) 등과 같은 전통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각종 문양을 시문하고 실용적인 기형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청색·홍색·녹색·황색 등의 단색유자기(單色釉磁器)가 제작되었고, 원대 이래의 코발트 색으로 문양을 그리고 유약을 칠한 청화자기(靑華磁器)가 장시 성[江西省] 징더진[景德鎭] 가마에 제작되어 외국에까지 수출되었다.
칠기(漆器)는 송(宋) 이래의 침금(沈金)·조칠(雕漆)·전칠(塡漆)·나전(螺鈿) 등 기법이 더욱 정교해졌고, 한국과 일본의 시회(蒔繪)에 영향을 주었다. 관영인 과원창(果園廠)이란 공장이 설립되어 뛰어난 칠기제품들이 제작되었다. 명 중기에는 서양으로부터 도입된 법랑기인 경태람(景泰藍)이 유행했다. 회화는 양식상 절파(浙派)·오파(吳派)·원파(院派)로 나눌 수 있다.
절파는 송원 이래의 화원(畵院) 전통을 이은 직업화가들로 기교위주의 형식적인 화풍을 보이며, 명초의 화단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화가는 화조화(花鳥畵)에서는 변문진(邊文進)·여기(呂紀)·임량(林良) 등이고, 산수화에는 대진(戴進)·이재(李在)·오위(吳偉)·장숭(蔣嵩)·장로(張路) 등이 있다. 오파는 원4대가(元四大家)의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을 이은 남종화가들로 15세기 후반에 대두하여 16세기 화단을 주도했으며 뒤에 여러 화파로 나뉜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심주(沈周)·문징명(文徵明)·문가(文嘉)·문백인(文伯仁)·진순(陳淳)·육치(陸治)·전곡(錢穀)·주천구(周天球)·육사도(陸師道) 등이다. 원파는 직업화와 문인화의 양식을 절충한 것으로 주신(周臣)·당인(唐寅)·구영(仇英) 등이 있다. 명말에는 동기창(董其昌)이 문인화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장했다. 서예는 명초에는 원말 조맹부의 단정전아한 서체가 유행했지만, 16세기에 서도(書道)를 주도했던 축윤명(祝允明)과 문징명은 송대 황정견(黃庭堅)의 서풍(書風)을 중시했다.
17세기 동기창은 당의 안진경(顔眞卿), 송의 소동파(蘇東坡)와 황정견의 서법을 섭렵하여 새로운 서체를 이룩해냈으며, 왕탁(王鐸)과 장서도(張瑞圖)는 자유분방한 초서를 구사했다(→ 명대 미술).
명대는 서방과의 육로가 거의 두절되었고, 해로도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시대였다. 외계와의 접촉이 가장 결핍된 시대였기에 국수적 발달을 성취했고 지나친 민족문화적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말기에 오면 서양인의 내항을 통해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종래 중국만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었던 당시에 마테오 리치가 전래한 〈곤여만국전도〉는 중국인의 세계관을 변화시켰다.
이후 계속해서 찾아온 서양인을 통해서 받아들인 서양의 지식과 과학은 중국적인 지식을 세계적인 과학으로 계몽하고, 향상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러한 서양과학의 영향으로 서광계의 〈농정전서〉·〈숭정역서〉, 초사정의 〈신기보 神器譜〉 등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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