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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권의 성장
1769년 8월 2일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가 이끄는 스페인의 원정대가 포교지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들은 강가에서 야영을 했고, 포르시운쿨라 천사들의 여왕인 성모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 그 강의 이름을 포르시운쿨라라고 지었다. 그들은 이 지역을 찾은 최초의 유럽인들이었다. 그들은 가까이 있는 양나(Yang-na) 촌락에 사는 온순한 유토아스텍어족(語族) 인디언들과 선물까지 주고 받으며 호의를 나눴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이곳을 떠났다. 그들이 하룻밤 머무는 동안 지진이 3차례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안 크레스피 신부는 그의 일기에서 "강가의 나무들 사이에 있는 이 아름다운 곳은 거대한 정착지를 만들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다"라고 적었다.
2년 뒤, 야영을 했던 곳에서 북동쪽으로 약 14km 떨어진 곳에 산가브리엘아르칸겔 포교지가 세워졌다. 10년 뒤 펠리페 데 네베 총독이 이곳에 와 이 비옥한 강변 분지를 관리했다. 그는 멕시코에서 44명의 신병들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은 대부분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1781년 9월 4일에 현재의 로스앤젤레스 강 서쪽 지역에 글도 제대로 모르는 문맹의 정착민들이 모여들어 약속받은 땅을 요구했으나 이 중대한 사건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신화 작가들은 시의 발전과 고귀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시의 이름에 걸맞도록 시의 건립사를 의례적으로 화려하고 웅대한 것으로만 다루어왔으며 실제 사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시의 명칭은 오랫동안 강의 이름과 혼동되어왔으나 지금은 시의 명칭이 엘푸에블로데라레이나데로스앙헬레스(스페인어로 '천사들의 여왕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대부분이 인정한다.
흔히 엘푸에블로라고 불렸던 초기의 시는 미국과 매우 고립된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뉴잉글랜드 출신의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지프 채프먼이 이곳에 정착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영국인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채프먼은 보스턴에서 온 붙임성이 좋은 해적이었는데, 1818년 그의 동료 선원인 흑인 토머스 피셔와 함께 이곳에 상륙했다. 험한 육로를 거쳐 이곳에 도달한 최초의 이방인은 모피 사냥꾼인 제디다이아 스미스로 그는 1826년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해는 독립국 멕시코가 엘푸에블로의 상공에 멕시코 국기를 올린 지 4년이 지난 해였다.
리처드 헨리 데이너가 이곳을 둘러보았던 1835년 로스앤젤레스는 시가 되었고 그당시 시의 인구는 약 1,250명이었다. 데이너는 1840년 발표한 〈2년 동안의 선원생활 Two Years Before the Mast〉이란 글에서 로스앤젤레스에 대해 "진취적인 사람들이 살게 되면 이곳은 얼마나 멋진 곳이 될까"라고 언급하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때인 1846년경에 캘리포니아 주의 주도였던 이곳은 진취적인 개척자들이 넘쳤다(멕시코 전쟁). 피오 피코 총독은 '양키 이주민(뉴잉글랜드 지방의 이주민)들의 무리' 때문에 난처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는 "양키 이주민들은 농장을 가꾸고, 포도원을 세우고, 방앗간을 세우고, 나무를 베고, 작업장을 만들 뿐 아니라 그밖에 자신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들일지 몰라도 캘리포니아인들은 무시하고 경멸하는 수천 가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1846년 8월 13일 존 C. 프리몬트 대위와 로버트 F. 스톡턴 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대가 시로 들어왔는데 발포는 하지 않았다. 그 다음해인 1847년 1월 폭동이 발생했으나 진압되었다. 같은 해 7월 4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처음으로 미국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있었다.
로스앤젤레스는 1850년 4월 4일에 로스앤젤레스 군의 군청소재지로 지정되면서 미국 도시로서의 발전을 시작했다.
1849년 한 개척 의사는 "도박·음주·매춘만이 판을 치고 있는 곳" 이라고 로스앤젤레스를 비난했다. 무법천지인 이 점토 목우지대는 금광개발에 따른 골드러시에 힘입어 번창했다.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의 굶주린 광부들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쇠고기를 순식간에 소비했다. 그러나 여러 해 계속 소의 값이 떨어진 데다가 1862~65년에 참혹한 가뭄까지 겹쳐서 목우의 시기는 막을 내렸다.
스페인인과 멕시코인들이 소유했던 거대한 무상양도토지는 저당잡히거나 파산 지경에 처했다. 토지소유주들이 미국의 법이나 미국이 정하는 이자율을 몰랐기 때문에 소유지는 분할되거나 매각되었고, 새로운 정착자들이 차지하기도 했다. 1860년 무렵 시는 매우 미국적이 되어서 투우는 금지되었고 대신 야구 클럽이 생겼다.
서던퍼시픽 철도가 1876년 놓였고, 1885년 샌타페이 철도가 들어왔다.
철도가 놓이게 되자 로스앤젤레스에서 먼 동부지역까지 오렌지를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대대적인 광고를 전개해서 서쪽의 새로운 에덴 낙원으로 이주해올 것을 호소했다. 철도 요금투쟁에 힘입은 1880년대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인구가 4배 이상 증가했다. 1880년에 1만 1,183명이었던 것이 1890년에는 5만 395명으로 늘었다. 크레스피 신부가 야영을 했던 곳은 빈틈없고 적극적인 양키 지지자들로 붐볐다.
그들은 마음 속에 그려왔던 시를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이 풍성한 축복의 땅에서 부족한 것은 항구와 적절한 물의 공급뿐이었다.
샌프란시스코나 샌디에이고와는 달리, 로스앤젤레스에는 천연 항구가 없다. 좁고 교묘하게 손질된 얕은 물길이 가까스로 내륙과 시의 항구를 연결해준다. 항구는 시청에서 남쪽으로 약 36km 떨어져 있다. 시에는 샌피드로와 윌밍턴 등 2개의 항구 지역사회가 있다.
이 항구 촌락들은 1909년 팽팽한 싸움을 벌이던 서던 퍼시픽철도회사와 '자유항구연맹'이 합병하면서 생긴 것들이다. 항구의 기능이 시작된 것은 1899년부터이고 최초로 시가 운영하는 부두가 개장된 때는 1914년으로, 파나마 운하가 완공된 해와 일치한다. 파나마 운하의 개통으로 대서양 연안에 있는 항구들과 로스앤젤레스 항구 사이의 거리가 약 1만 2,800km 단축되었다. 로스앤젤레스 항은 미국 서부연안의 항구 가운데 가장 분주한 항구가 되었다.
시가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일이 어려움에 부딪혔다.
새로운 급수원을 찾기 위해 궁리하던 수도국 관리자 윌리엄 멀홀랜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북동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오언스 계곡을 조사한 뒤 과감한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획은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남쪽 비탈로부터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을 송수로를 통해 로스앤젤레스까지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오언스 계곡의 목축업자들을 분노시켰고, 2개의 신디케이트를 구성하고 있던 로스앤젤레스 투기꾼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나쁜 일을 한다는 소문들이 퍼져나갔다. 이 사건은 지나치게 허구화되었고, 1974년 〈차이나타운 Chinatown〉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1913년 11월 5일 수천 명의 시민들은 오언스 강물이 작은 폭포가 되어 샌퍼낸도 계곡의 방수로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자리에서 멀홀랜드는 "자, 직접 보고 믿으시오"라고 말했다. 송수로는 길이가 372km이고, 독립된 터널들만 해도 142개나 되었다.
터널의 총길이는 약 83km, 모노 분지로 이어지는 연장선의 길이는 168km였다. 이 송수로는 시가 필요로 하는 급수량의 80%를 공급한다. 나머지 20%는 캘리포니아 송수로나 콜로라도 강 등의 지방 수원지에서 공급된다.
1976~77년에 극심한 가뭄이 닥쳤고 비슷한 재해가 1985년에도 일어났다. 그들의 급수지인 콜로라도 강의 물을 애리조나 주도 사용할 수 있도록 법령이 공표된 것이다. 당시 북부 캘리포니아에 내린 비와 눈으로 지표수의 3/4 가량이 채워졌다. 그러나 반 이상의 주민들이 남부에 살기 때문에 강력한 농민조합과 재기넘치는 도시의 환경보호론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물 전쟁'이 계속되어 법정·입법기관·투표장 등에서 부딪혔다.
현대의 도시
20세기초의 10년 사이에 로스앤젤레스의 인구는 3배나 증가해서, 약 10만 명이던 인구가 거의 32만 명에 달했다.
그동안 샌프란시스코는 1906년에 발생한 지진의 잔해를 정리하고 있었다. 한 지방 기업가가 1902년 미국 최초의 영화관을 개관했고, 또다른 기업가는 늘어나는 자동차를 수용할 수 있는 주유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펄 모튼과 코라 필립스가 경영하는 붉은 매춘지역 출신의 여자들은 양산을 든 채 여전히 무개마차를 타고 다녔다. 이들은 끊임없이 로스앤젤레스로 밀려드는 중서부지방 출신의 은퇴한 약제사, 치과의사, 밀 농사꾼들에게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스마트 세트 Smart Set〉지의 한 집필가는 1913년 3월호에서 "가치관이 치명적으로 병들었다"고 썼다.
그는 "시가 지나치게 팽창하여", 그결과 "심령주의자, 무당, 점성술사, 골상학자(骨相學者), 손금장이, 그밖에 모든 종류의 신비적 수다장이들로 들끓고 있다" 고 묘사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떠돌이 작가들은 똑같은 어조로, 시가 기괴한 것들의 공공연한 수용소나 다름없다고 되풀이했다.
"로스앤젤레스는 현실 부적응자들의 궁극적인 격리장소이다"라고 버트런드 러셀이 말한 바 있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도 이 말에 동의했다.
1940년 라이트는 "마치 미국을 거꾸로 뒤집어서 평범한 사람들이 남부 캘리포니아 쪽으로 쏠리게 한 것 같다"고 로스앤젤레스의 과잉성장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후 몇 년 사이에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아놀드 쇤베르그, 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루노 발터, 프란츠 베르펠, 리온 포이히트방거, 알프레드 노이만 등 재능이 뛰어난 유럽인들이 대거 로스앤젤레스로 망명해왔다. 그래서 '제4의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가 되었다.
시민들은 민족적·문화적·경제적 차이에 따라 서로 격리된 채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파도 타기·승마·스키·요트·하이킹·골프·테니스 등을 즐길 뿐이다. 세계의 어떤 시도 로스앤젤레스만큼 거리낌없이 태연하게 향락을 추구하는 곳은 없다. 시는 또 가장 많은 도시들 사이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모방되기도 한 반면 조롱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가 예시하는 어두운 미래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27년에 브루스 블리븐은 "미래의 문명이 뜨거운 통 안에서 뒤섞여 들끓고 있는 암울한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도가니"라는 말로 로스앤젤레스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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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로스앤젤레스의 역사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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