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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양반의 후예이자 서자였던 최제우는 당시 사회에서 입신출세할 수 없었다.
그러한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면서 40세가 될 때까지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1860년 4월 5일 전통적인 무속에서의 신병체험과 유사한 일종의 강신체험(降神體驗)을 했다. 이 체험을 통해 한울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고 이 한울님을 마음에 성심껏 모시는 것이 바로 도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도를 일반 백성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자신이 깨달은 도를 논리적으로 정립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래서 한문으로 되어 나온 것이 〈동경대전 東經大全〉이고 일반 대중들을 위해 한글 가사체로 쓴 것이 〈용담유사 龍潭遺詞〉이다.
이 과정에서 동학교도들은 점차 늘어나 교도들을 조직하고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각 지역의 동학교도들을 통솔할 책임자로 '접주'(接主)들을 임명했는데 그 지역을 '접소'(接所)라고 명했다.
동학 세력이 확대되자 조선 정부는 동학을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해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했다. 그러나 동학 세력은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교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보려는 신원(伸寃)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마침내 최제우에 의해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비롯한 많은 동학교도들은 1890년대에 본격적인 교조신원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은 교조 최제우는 결코 서학의 모리배가 아니었으며 그가 펼친 동학은 서학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동학교도의 정당한 종교활동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조선 정부는 매우 미온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소극적인 반응에 대해 동학교도들은 의견이 2가지로 갈라졌다.
남접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들은 동학을 합법화시키기 위해서는 부패한 봉건정부를 폭력적으로 타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 강경론을,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 세력은 현단계에서 동학이 해야 할 일은 정부당국에 대한 직접적 공격보다는 지속적인 교세확장으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온건론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두 파 사이에는 단순한 의견대립을 넘어 상대방에 대한 비방과 비난이 행해지기도 했다.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조선 말기의 사회적 부패와 억압적 상황은 혁명적 상황을 예고하고 있었다.
마침내 1894년 전라남도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가 기점이 되어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일어났다(동학농민혁명). 이 전쟁에서 동학교문(東學敎門)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남접이 주장하던 봉건정부의 타도를 통한 동학교문의 합법화와 사회개혁의 논리가 이 농민항쟁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북접 세력은 전쟁의 초기 단계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동학교도에 대한 정부의 무차별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쟁의 전반부에서는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군측이 파죽지세로 정부군을 공격해 나아갔으나 후반부에 이르러 청과 일본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에 대패했다. 전쟁에 참패한 동학교도들은 그후 지하에서 동학교단의 재건을 추진해 나아갔다. 전쟁에서 잔존한 북접 접주들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단은 1900년 손병희(孫秉熙)를 제3대 교주로 내세워 천도교라는 합법적 교단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가 과연 과거의 동학을 진정으로 계승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져 천도교에 반대해 별도의 교단이 생겨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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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동학의 창도 및 전개과정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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