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종교개혁의 역사

다른 표기 언어

요약 16세기초 북유럽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 교의(敎義)와 제의(祭儀)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한 그리스도교 교파가 발생한 과정.

루터의 역할

루터는 이전의 개혁자들이 교회의 생활을 공격하였다면 자신은 교회의 교의를 공격하였고 이 점이 서로를 구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루터 이전의 개혁자들은 성직자들의 죄를 공공연히 비난하였지만, 그는 구원에 대한 스콜라 신학의 도식에 환멸을 느꼈다.

스콜라 신학은 사람들이 고백과 고해성사에 의한 사면을 통해 죄를 하나하나 지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기억할 수도 없고 심지어 인지(認知)할 수도 없음을 발견했으며 그것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상처 딱지를 떼어냄으로써 천연두를 치유하려는 것과 같음을 깨달았다.

그는 인간성 전체가 병들어 있다고 믿었던 반면, 교회는 인간이 병들어 있기는 하나 각 개인의 선행으로 악행을 보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하느님과 그리스도 앞에 자신이 어떻게 서 있는가에 대해 지극히 솔직하였다. 무지개 위에 앉아 있는 심판자 그리스도가 칼로 나무를 베듯이 저주받은 자를 지옥으로 가도록 선고하리라는 생각은 그를 공포로 가득채웠다. 그는 수도원 생활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결산 이상의 공덕(功德)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최상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수사가 되었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죄많은 난쟁이와 같은 자신이 하느님의 가차없는 정의와 위엄 앞에 설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를 수 없었다. 끊임없이 고해실에 의존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그로 하여금 인간성 전체의 근본적인 죄성(罪性)을 깨닫게 하였을 뿐이다.

그후 그는 인간을 그토록 약하게 만들어놓은 다음 스스로 어찌해 볼 수도 없는 인간을 저주하는 신의 선의(善意)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다.

루터에게 구원은〈시편〉 연구를 통해서 왔다. 그는〈시편〉22장이 특별한 것을 계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시편〉22장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한 말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구절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바로 그때 그리스도는 아무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죄많은 인간과 일치시켰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무지개 위에 앉아 있었던 심판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버림받은 그리스도가 되었다. 거기서 하느님의 진노와 하느님의 은혜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였고, 하느님은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느님은 의롭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 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표어가 된 신앙의인론(信仰義認論)의 교의였다.

루터는 1517년 모든 성인의 날에 95개조를 내걸었다. 여기서 그는 3가지 주요논점들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재정 오용에 관한 것으로, 그는 만일 교황이 독일 민중의 빈곤을 알고 있었다면 그가 치는 양들의 피와 가죽으로 성 베드로 대성전을 짓지 않고 재 속에 그냥 두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교의적 오용이었다. 예를 들면, 교황은 연옥에 대한 관할권이 없으며 있더라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가없이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는 종교적 오용을 공격한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의 보물은 복음이므로 성인들의 공로를 기리는 보물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인데, 교황권이 루터의 입장을 이단으로 선고하였을 때 루터는 이에 맞서 교황들의 무류성과 공의회들의 결정을 부정하고 성서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선언하였다.

루터는 여러 지역에서 후원을 받았다.

이미 널리 확산되어 있었던 자유주의적인 가톨릭의 복음중심적 개혁은 성직자들의 축첩, 부당한 재물 취득, 성직 겸임(한 사람이 영국·독일·프랑스 등 서로 다른 지역에서 몇 개의 성직을 차지하는 행위) 등의 도덕적 오용을 바로잡으려 했고, 성인과 그 유물에 대한 공경, 종교적 순례 등과 연관된 대중의 미신을 조롱하였다.

개혁운동의 대표자들은 어느 곳에나 있었다.

이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교황 레오 10세가 교황직의 종교적 측면을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루터는 급속히 분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1520년까지 루터에게 교황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명령하는 것을 연기하였다. 교황권의 세속화가 루터를 구해준 셈이다. 그리고 루터는 세속화된 교황권을 무너뜨렸다.

1520년 여름 그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선언문 일부를 공표하기 위해 골몰하였다.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을 향한 연설 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은 루터가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던 황제를 포함한 독일의 지배계급에게 사도의 청빈과 소박함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교회를 외적으로 개혁하자고 호소하였다. 교회 개혁을 위해 시민 권력을 향해 외친 이 호소는 황제들이 부적격한 교황들을 폐위하고 대체시켰던 중세 초기의 관행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루터는 교황권이 불과 400년의 연륜을 가졌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85 재위)의 교회개혁이 교회에게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가장 저열한 사제도 가장 훌륭한 왕보다 인류를 위해 더 좋은 일을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교회가 행정 영역에 간섭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교인 행정장관들을 포함해 모든 신자들이 다 사제라는 교의를 가지고 이에 대처하였다. 평신도는 직업상 교구 사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누구나 사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통치자는 그 자신이 사제이기 때문에 비록 교회가 그를 영적으로 파문하더라도 교회를 외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가톨릭 개혁가들은 교황권을 적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이 교의에 동의를 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동일시에서는 중세기 종파들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루터는 성사(聖事)를 다루는 또다른 1편의 논문 〈바빌론 유수 The Babylonian Captivity〉를 썼다. 이 제목은 성사가 교회에 포로로 잡혀 있음을 시사한다. 루터는 성사의 수효를 7개에서 2개로 줄였다.

7개의 성사는 성세성사(세례)·성체성사(성만찬)·고해성사·견진성사·성품성사·혼인성사·병자성사였다. 루터는 성사를 그리스도가 제정한 의식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오직 세례성만찬만이 엄격하게 성사로 인정되었고 고해는 고백으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루터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성만찬에서 사제의 기원 때 빵과 포도주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형된다고 주장하는 실체변화를 부정했다(→ 종교상징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제단 위에 실제로 임재한다고 믿었다(→ 실체적 임재).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물체와 "함께, 그 안에, 그 가운데" 존재한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제단 위에 존재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모든 곳에 있다면 왜 특별히 그곳에 있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고려하여 하느님이 말씀의 선포와 성사의 거행을 자기계시의 두 방식으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서 신자들의 눈이 열린다.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교황에게 굴복하기는커녕 교회법 사본 1부와 그의 굴복을 요구한 교황의 교서를 불태워버렸다.

정상적인 절차대로 진행되었다면, 그는 즉각 파문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의 후견자였던 작센의 제후인 현명왕 프리드리히는 루터에게 공정한 자기변호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의회로 끌려갔으며 자신의 책들을 부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만일 그가 성사를 다룬 책을 부인하였다면, 다른 논점들은 협상의 여지가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의 정당성을 모두 인정하였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책들에서 펼친 교설들 가운데 일부라도 부인하는지, 또 오랫동안 전해온 가톨릭 교설들을 감히 거부한 그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루터는 우쭐거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우쭐거리지도 않고, 또 악의를 가지지도 않고 대답하고자 합니다. 나는 성서와 명석한 이성에 의해 유죄평결을 받지 않는 한(물론 저는 교황과 공의회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그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만) 나의 양심은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을 것입니다.

양심을 거슬러 가는 것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어느 것도 철회할 수도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그후 황제는 루터를 황제의 금령 아래 두었고 공식적인 파문칙서가 공표되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현명왕 프리드리히는 곧 루터를 은신처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채에서 1년 동안 은신하였다.

이 강요된 은둔 기간에 그는 〈신약성서〉 전체를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토착적이면서 날카롭고 힘찬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성서 번역). 이것은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의 독일어는 관용구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번역본의 반포만큼 그의 가르침에 대중이 추종하도록 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납득을 하지 못했다.

에라스무스 같은 자유주의 가톨릭 개혁자들은 루터의 역설에, 자신의 성서 해석이 옳다는 루터의 확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을 사람이 한 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주하는 폭군으로 만드는 예정론을 루터가 수용한 것에 대해서 주춤하였다. 독일 민족운동이 붕괴되자 루터의 측근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개신교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였다. 이 개신교의 형태들은 전체적으로 '종교개혁 좌파'나 '급진적 종교개혁'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어떤 용어로도 명확한 분류는 가능하지 않다.

가장 급진적인 스위스 종교개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은 울리히 츠빙글리였다.

그는 음악을 비롯한 여러 감성적 효과들을 종교의식에서 추방하였으며, 주의 만찬을 기념적·선언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칼뱅의 역할

개신교의 또 하나의 형태는 칼뱅주의로, 이는 프랑스인 장 칼뱅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인문학과 법학 교육을 받았으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전향한 결과 프랑스를 떠나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젤에서 27세의 나이로 〈기독교 강요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초판을 발표하였다. 계속 이 책은 증보되어 수세기에 걸쳐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는 의인(義認 justification)과 성서의 유일 권위에 대해서는 루터와 근본적으로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

주의 만찬에 대해서는 스위스 급진파와 루터파 견해의 중간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임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영은 보편적이며 부활한 주와의 진정한 합일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칼뱅은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회중의 시편 찬송을 좋아했는데, 바로 이 점은 프랑스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와 신대륙 장로교의 특징이 되었다. 예술에 관해서는 성인들의 상(像)과 십자가상(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십자가는 허용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칼뱅주의가 종교의식에서 음악과 예술에 소원하다는 일반적인 견해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칼뱅의 사상은 루터와 강조점이 서로 다르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된다. 루터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도피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찾은 반면 칼뱅은 하느님의 심판의 공포를 보다 고요하게 명상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심판은 선택받을 자들에게는 닥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선택받은 자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그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었고 일생 내내 신앙과 확신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였다. 그러나 칼뱅은 근사치에 가깝고 입수가능한 시금석들을 갖고 있었다. 칼뱅은 지극히 내적이고 또 무행인 거듭남의 경험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후에 칼뱅주의는 원래 칼뱅의 입장에서 벗어나 선택의 표시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뇌했다.

칼뱅에게는 3가지의 시금석이 있었다. 첫째는 신앙고백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츠빙글리와 견해가 같다. 둘째는 엄격하게 훈련된 그리스도교적 품행이며, 이것은 재세례파와 같은 견해이다. 셋째는 성례전에 대한 사랑이다. 유아세례는 반복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가 말한 성례전은 주의 만찬을 의미한다.

칼뱅은 어떤 사람이 이 3가지 시금석을 갖추었다면, 그는 선민(選民)임이 분명하므로 더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은 주로 헨리 8세의 정치적 의지에 의해 영국에 퍼졌다. 그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곤경에서 헤어나기 위하여 1534년 그 자신이 국교회 수장(首長)이라고 선언하였다.

영국 국교회의 성격과 지위, 로마 가톨릭과의 경쟁이 정치적인 쟁점이었던 300여 년 동안 보다 근본적인 발전은 개신교 교회 내부에서 일어났다. 청교도 혹은 분리주의자로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와 비국교도들은 장로교 및 회중교회 형태의 교회 조직과 예배를 발전시키고 이를 확립하였다.

예배의 단순성과 하느님에 대한 개인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한 영국 청교도는 경건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독일과 동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된 경건주의는 수많은 종파들과 운동이 생겨나게 했으며 이들의 공통점은 '마음의 종교', 곧 하느님의 은혜를 신자들이 마음으로 느낌으로써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결국 형제단(Unitas Fratrum) 또는 모라비아 교회(Moravian Church)로 불리는 경건주의 집단은 영국 사람 존 웨슬리에게 영감을 주어 감리교 운동을 창시하게 하였다.

이 감리교 운동은 복음주의로 알려진 보다 일반적인 현상의 주요표현이었다.

옥스퍼드의 링컨 칼리지 학생시절에 웨슬리는 성서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생단체를 결성하였고, 선교를 위해 조지아를 여행했으며, 모라비아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경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일생을 영국에서 복음주의적 설교를 하는 데 바쳤다.

그는 분리를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 당시 영국 국교회의 교구체계는 자유로운 복음설교와 평신도 설교자에 관한 웨슬리의 계획을 수용할 수 없었다. 결국 1744년 웨슬리는 제1차 설교자대회를 개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은 감리교협회의 치리기관인 연례 대회가 되었고, 1784년에는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감리교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가 조금은 소홀히 여기는 감정과 양심을 중시하였다.

감리교 운동은 은혜의 교의에 새롭고도 헌신적인 자극을 주었으며, 한때 경건주의에서 나타났으나 17세기 중반 이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을 때 일시적으로 쇠퇴한 바 있던 도덕적 진지함을 중시하는 전통에 합리성을 부여하였다. 18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은 가장 위대한 찬송가 작사가들, 즉 필립 도드리지(1702~51)와 찰스 웨슬리(1707~88)를 낳았다.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유산

미국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서구사회의 역사와 그 안에서 발전한 개신교 운동의 역사를 변화시켰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규정한 미국 헌법은 식민지시대의 유산이었던 자유로운 교회가입의 정신, 유럽에서 끊임없이 도래한 이민자들의 종교적 혼합, 영국에서 지배했던 '교회와 왕'의 동맹에 대한 반작용, 계몽주의의 세속 정신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과 더불어 세속의 국가이념은 수많은 유럽 자유주의자들, 특히 로마 가톨릭 국가들의 반성직주의자들의 이상이 되었다. 미국의 유형은 나폴레옹의 유형보다 유럽 개신교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국교화된 개신교 교회에 익숙했던 독일·스칸디나비아·네덜란드·스위스·영국·스코틀랜드의 세속국가들에서는 한동안 국교 폐지의 강력한 요구가 없었다.

이 모든 나라에서 독립교회 혹은 비국교도 교회의 교인들은 19세기 동안 완전한 관용과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 국가가 아닌 곳에서는 19세기 동안 국가와 국교회 사이의 형식적 연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예외가 있다면, 영국국교회가 소수파로 존재하였던 아일랜드(1871)와 웨일스(1914~19)뿐이었다. 그러나 국교회는 최소한 외적이고 역사적인 형태로 영국·스코틀랜드·스칸디나비아 등 3국에 남아 있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멀티미디어 더보기 4건의 연관 멀티미디어 95개 조항(Ninety-five Theses)
다른 백과사전


[Daum백과] 종교개혁의 역사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