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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14경, 스코틀랜드 로디언 해딩턴 근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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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72. 11. 24, 에든버러 |
국적 | 영국, 스코틀랜드 |
요약 스코틀랜드 교회의 엄격한 도덕적 기조를 마련했으며, 스코틀랜드 교회가 채택한 민주적인 교회 운영방식의 창안자이기도 하다. 1546년 이단으로 화형당한 조지 위샤트의 영향을 받았으며 위샤트가 화형된 다음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대변자가 되었다. 간헐적인 투옥과 영국 및 대륙에서 망명생활을 겪은 뒤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으며 이곳에서 개혁교회 조직과 제식을 마련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존 녹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이다. 녹스는 논란이 많은 인물이며, 그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도 학자들의 종교적·정치적 견해에 따라 다양하다. 종교개혁은 하느님의 뜻이므로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녹스의 확신은 많은 신도들에게 커다란 감화를 주어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를 세우는 반석이 되었다. 이성과 감정을 잘 융화시키는 설교가였으며, 녹스가 다른 교파에 대한 포용력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칼뱅주의는 후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온건했다.
개요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엄격한 도덕적 기조(基調)를 마련했으며, 스코틀랜드 교회가 채택한 민주적인 교회 운영방식의 창안자이기도 하다.
1546년 이단으로 화형당한 조지 위샤트의 영향을 받았으며 위샤트가 화형된 다음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대변자가 되었다. 간헐적인 투옥과 영국 및 대륙에서 망명생활을 겪은 뒤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으며 이곳에서 개혁교회 조직과 제식(祭式)을 마련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존 녹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 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Scotland〉이다.
초기생애
1540년 이전 존 녹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전기작가들이 전하는 존 녹스의 초기 이야기는 대부분 허구일 뿐이다. 녹스의 가문에 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어머니 이름이 싱클레어(녹스는 신변에 위험이 느껴지면 존 싱클레어라는 익명을 사용했음)였고, 아버지 이름은 윌리엄이었으며, 잉글랜드의 헨리 8세 군대와 스코틀랜드가 격돌한 플로든 전투로 추정되는 전쟁에 그의 아버지·할아버지·외할아버지가 참전하여 두 사람이 전사했다는 사실 뿐이다. 녹스의 일가는 농민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녹스는 세인트앤드루스대학에서 존 메이저라는 학자로부터 사제수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학위를 취득하지는 않았지만, 수업을 마쳤을 때는 당시 전유럽에서 스코틀랜드의 전형적인 학풍으로 알려진 추상적 사유와 변증법적 논의에 숙달해 있었다. 1540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1543년에는 해딩턴 지역에서 로마 교황청 공증인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로 미루어 당시 존 녹스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 듯하다.
그러나 2년 뒤 정치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음모에 깊숙이 관련된 동(東)로디언의 두 귀족의 아들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됨으로써 존 녹스의 교제 관계가 보다 모호해졌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이 때문에 일찍 순교하게 되는 조지 위샤트가 이 두 귀족의 보호 하에서 1545년 12월 로디언 주민들을 위한 설교여행을 시작했다. 존 녹스는 이들과 더욱 깊은 교분을 맺었고 위샤트와 접촉한 시기에 완전히 개혁 신앙으로 개종한 듯하며, 이후 늘 위샤트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했다.
위샤트는 1546년 3월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이자 스코틀랜드의 실질적인 지배자 데이비드 비턴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다. 위샤트의 처형으로 존 녹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일련의 사건이 터졌다. 3개월 뒤 세인트앤드루스 성(城)을 장악한 프로테스탄트 음모자들은 비턴을 살해했다.
그동안 존 녹스는 제자들과 함께 박해와 체포를 피해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녔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본거지인 독일에 가서 연구를 계속하려 했으나 존 녹스를 가정교사로 고용한 두 귀족은 그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세인트앤드루스로 돌아와 이 성내에서 안전하게 교육을 계속해달라는 전갈을 보냈다. 비턴이 살해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1547년 4월 자신의 뜻과는 달리 녹스는 제자들과 함께 세인트앤드루스로 돌아왔다. 당시 녹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세인트앤드루스 성에 있는 동안 자신의 차분한 성격과는 달리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운동의 대변자요 지도자로 변신했다.
세인트앤드루스 성을 장악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진작부터 세인트앤드루스대학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비상한 재능을 가진 존 녹스가 프로테스탄트 편에 있음을 알고 녹스의 양심에 압력을 가해 '공직과 설교'를 맡아달라고 강요했다.
존 녹스의 성향은 서재와 교실의 조용한 분위기에 적합했으며 금지되고 박해받는 종교의 설교자로서 생명을 건 위험과 부담을 지는 데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들의 요구를 눈물로 거부했으며, 그후에도 오래도록 망설이던 끝에야 권유를 받아들여 세인트앤드루스 시에서 설교했다.
이 설교를 함으로써 존 녹스는 동지와 적 모두에게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티즘의 위대한 대변자로 인정받았다. 이 사건은 녹스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로 녹스는 자신의 설교가 하느님의 부름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고, 타고난 조용한 성격과 달리 자신이 웅장한 설교를 한다는 점에서 이 설교 능력은 하느님이 부여했다고 확신했다.
1547년 6월말에 프랑스 원군이 스코틀랜드 총독을 돕기 위해 도착했다.
세인트앤드루스 성의 프로테스탄트 수비대는 밖으로부터는 공격을 당하고 안에서는 흑사병이 퍼져 위기에 처하자 마침내 조건부 항복을 했다. 그러나 항복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고, 존 녹스와 그밖의 사람들은 프랑스의 갤리선 노예로 끌려갔다. 잉글랜드의 개입으로 녹스는 체포된 지 19개월 만에 풀려났으나 영원히 건강을 상실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6세가 이끄는 프로테스탄트 정부는 더 신속히 종교개혁을 추진하려고 성직자와 시민을 재촉했으며 이를 위해서 설교자와 전도자의 확보가 시급했다.
당시 존 녹스는 로마 가톨릭 지배하에 있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잉글랜드 정부는 즉시 그를 안수 목사단의 일원으로 만들어 북부로 파견하여 말썽 많은 수비대 주둔 도시 베릭-어폰-트위드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전파하도록 했다. 녹스는 이 도시의 질서를 회복하고 청교도 계열의 집회를 조직했으며, 이곳에서 후에 그의 아내가 된 마저리 보스를 만났다.
1551년초 존 녹스는 뉴캐슬에서 새로운 임무를 맡았으며 곧이어 6명으로 구성된 궁정 목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주기적으로 궁정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위해 설교하고, 종교개혁의 열의가 없는 성직자들의 교구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얼마 후 로체스터 주교직과 런던의 올핼로스 교구신부직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정부의 후원하에 순회 목회는 계속했는데, 주로 버킹엄셔·켄트·런던 지방을 순회했지만 이들 지역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존 녹스는 영국 성공회에 3가지 면에서 자취를 남겼다.
첫째, 성공회 규약을 만드는 데 참가했다. 둘째, 〈성공회 기도서 The Book of Common Prayer〉에 이른바 블랙 루브릭(black rubric)을 삽입하도록 했는데, 이는 성찬에서 사용되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현현하는 것이 아니며 성찬식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빵과 포도주에 대한 경배가 아니라는 내용이다. 셋째, 교리와 신앙 양면에서 종교개혁의 원칙을 더욱 엄격히 적용할 목적으로 영국 성공회 내부에서 시작한 개혁운동인 청교도주의를 육성시킨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대륙으로 망명
1553년 로마 가톨릭교도인 메리 튜더가 왕위를 계승하자 존 녹스는 그 나라를 떠난 최후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 대열에 끼였다.
잉글랜드에서 '참된 종교'의 운명이 한 여자의 종교적 견해에 좌우되는 것을 보고 혼란에 빠진 존 녹스는 유럽 대륙으로 피신했으며 한 군주의 개인적 변덕에 따라 국가의 종교 문제가 좌우될 경우, 어디서도 종교개혁의 안전은 보장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무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끝에 녹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고, 이는 후에 스코틀랜드에서 적용되었다.
즉 하느님을 믿는 관리와 귀족은 참된 종교의 안전을 위협하는 지배자에 대해서는 필요하다면 무력으로라도 저항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1554년 존 녹스는 영국에 남아 있는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을 위해 〈신앙권고문 Faithful Admonition〉을 출간했으나, 여기에 나타나는 극단주의와 과격한 표현 때문에 잉글랜드의 프로테스탄트들은 더 큰 박해를 받았으며, 자신은 편안히 지내면서 이런 과격한 글을 썼음을 알고 잉글랜드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녹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같은 해 장 칼뱅의 권고에 따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주로 청교도로 구성된 망명 신도들의 교회 목사가 되었으나, 불과 몇 개월 후 그만두었다.
그후 제네바에서 마지막으로 스코틀랜드로 귀환하는 1559년까지 잉글랜드인 망명자 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나 베릭 방문(1555~56)과 9개월간의 스코틀랜드 체류로 직책 수행이 잠시 중단되었다. 스코틀랜드 체류기간 중 마저리 보스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두 아들을 남긴 채 1560년 사망했다.
에든버러에서 종교개혁의 진보와 이곳의 모든 계층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여준 뜨거운 환영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귀족들의 시골 저택을 방문한 자리에서 존 녹스는 이들에게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박해하는 가톨릭교도인 군주에게는 저항하는 것이 마땅하며 로마 교회의 모든 의식(儀式)을 거부하고 유사시 프로테스탄티즘을 수호하기 위해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소환 명령을 받고 제네바로 돌아갔으며 스코틀랜드 신자들에게 〈유익한 권고의 편지 Letter of Wholesome Counsel〉(1556)라는 중요한 저서를 남겼다.
존 녹스는 글을 통해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가정예배와 매주 성서연구 및 토론을 위한 모임을 갖도록 권고했다.
스코틀랜드로 소환
1559년 봄 스코틀랜드 사태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2년 전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존 녹스의 권고를 받아들여 '단체'를 만들고 계약을 체결하여 '야훼의 회중'(The Congregation of the Lord)과 성직자(오늘날 회중의 귀족[Lords of the Congregation]으로 명칭이 바뀜)들을 육성하고 보호하기로 맹세했다. 섭정을 맡고 있던 프랑스 태생 기즈의 메리는 이들에게 양보해야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1559년초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적대관계가 해소되고 프랑스가 스코틀랜드에 더욱 강력하게 개입하게 되자 섭정 메리는 이 시기가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을 막을 결정적인 때라고 보았으므로, 프로테스탄트 설교사들에게 프로테스탄트 신도의 반항을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5월 10일 스털링에 출두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프로테스탄트측은 제네바에 있는 존 녹스를 소환했으며 프로테스탄트 귀족·영주·평민 들은 던디에 결집했다. 5월 4일 녹스는 이들에 가담하여 함께 퍼스로 진군했고, 이곳에서 열정적인 설교를 했으며, 그후 수도원을 점령했다.
6월말까지 프로테스탄트파는 에든버러를 점령했고, 존 녹스는 세인트자일스에서 설교했으나 승리는 환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프로테스탄트 자원군은 수 주일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즉 메리가 이끄는 용병이 지속적으로 전세를 압도해 프로테스탄트 자원군의 힘이 약화되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 중요한 시점에 프랑스의 앙리 2세가 사망하자 프랑스의 권력은 기즈가(家), 즉 섭정인 메리의 형제들, 프랑스 왕 프랑수아 2세의 부인이자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의 숙부들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이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폐위시키고, 프랑스의 프랑수아 2세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주도하에 프랑스·스코틀랜드·잉글랜드를 통합하려는 기즈가의 계획에 보조를 맞추어 스코틀랜드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로써 중요한 국제정치적 논쟁이 스코틀랜드 종교문제와 연루되었으며,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가 승리할 경우 엘리자베스 여왕과 잉글랜드는 위기에 처할 것이므로 존 녹스는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파와 제휴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고 이를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납득시켰다.
1559년 가을과 겨울에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파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였으나, 오직 존 녹스의 초인적인 노력과 불굴의 정신 덕택에 종교개혁의 대의명분을 유지했다. 가장 암담한 시기에 녹스는 절망에 빠진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고 스코틀랜드 정부가 이끄는 프랑스 용병의 승리를 막았다. 이 몇 개월 동안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교와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하는 잉글랜드의 운명은 전적으로 녹스의 결심에 달려 있었다.
1560년 봄 마침내 엘리자베스 여왕은 제휴에 동의했고, 4월에 1만 명의 잉글랜드 군대가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파와 합류했다.
섭정 메리가 에든버러 성에서 사망하자, 전의(戰意)를 상실한 프랑스 군대는 항복했다. 조약에 따라 잉글랜드와 프랑스군은 철수하고 승리한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측이 국내의 질서회복을 맡게 되었다. 메리 여왕은 로마 가톨릭교도인데다가 프랑스에 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큰 권한을 행사한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이에 왕의 재가 없이 8월에 개최하여 종교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s Confession:녹스와 다른 3사람이 서둘러 준비했음)가 채택되었고 교황의 관할권은 폐지되었다.
개혁교회의 형성
존 녹스는 저명한 교회 성직자로 구성된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스코틀랜드 의회에 개혁교회 조직과 재정에 대한 제안이 담긴 〈첫번째 교회규율서 First Book of Discipline〉를 제출했다.
예배는 〈공동전례집 Book of Common Order〉(녹스의 의식문집이라고도 함)의 규정을 따랐다. 이에 의하면 교회 운영은 일반 신도들이 매년 선출하는 장로가 담당하며 장로는 목사를 도와 신도들이 엄격한 도덕적 교육을 지키도록 하고, 목사는 일반 평신도들이 선출하지만 동료 목사들이 그의 생활과 교리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한 뒤 지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가장 유능한 목사들을 대략 과거의 교구와 일치하는 지역의 감독으로 임명하도록 했으며, 이들은 해당 지역의 목사와 신자를 감독하며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지방교회 회의의 지원을 받도록 되었다. 평신도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존 녹스의 체제는 이후 장로교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교회규율서 The Book of Discipline〉에는 매우 정교한 교육안, 당시 시급한 문제였던 체계적인 빈민구호책에 대한 개요, 구(舊)교회 재정을 활용해 비용이 많이 드는 신(新)교회 계획의 재정을 충당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 제안은 재정문제에 걸려 좌절되었다.
구교회 재산은 귀족의 토지 가운데 척박한 토지를 약탈한 것이었으므로 귀족은 '녹스의 경건한 계획'에 거의 공감하지 않았고, 의회도 재정 문제를 묵살한 채 당시 남아 있던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들이 수입의 일부를 기부하여 개혁교회의 유지에 도움을 줄 경우 이들에게 잠정적으로 성직록(聖職祿)을 종신 임대해주는 임시방편만을 취했다. 존 녹스는 자신의 교육안 및 빈민구호책이 강제로 폐기되고 개혁 교회에 대한 대비책이 거의 마련되지 못해 크게 실망했다.
1561년 메리 여왕이 스코틀랜드에 왔다.
그녀는 이미 존 녹스가 자신의 가장 큰 적이며 스코틀랜드에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녹스는 처음에 이 젊은 여왕과의 협력을 기대했으나 곧 여왕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녹스가 여왕과 만난 4번 중에 3번까지는 정중함을 갖춘 접견이었으나, 4번째 알현에서 치열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당시 여왕이 스페인의 돈 카를로스와 결혼할 생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녹스는 이 결혼이 성사될 경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 뻔하며 잉글랜드에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음을 예상하고 프로테스탄트측에 경고했다.
1564년 여왕 메리는 프로테스탄트교 신자인 왕실고문들을 해임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여 실정을 저질렀다.
한동안 개신교는 실질적인 위기에 처했으나, 1567년 메리 여왕이 파멸 끝에 퇴위하고 뒤를 이어 존 녹스의 오랜 친구인 머리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섭정을 했다. 제임스는 개신교의 막강한 후원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곧 살해당하고, 스코틀랜드는 메리 여왕의 지지자와 섭정의 지지자들 간의 싸움판이 되었다. 녹스 역시 이 싸움에 관여했으나 중풍으로 고생했다.
1571년 에든버러에서 두 파당 사이의 투쟁이 격렬해지자 양측 지도자들은 모두 존 녹스를 안전히 세인트 앤드루스로 호송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1572년 녹스는 에든버러로 다시 돌아왔으며, 죽을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대학살을 당했다는 소식이 스코틀랜드에 전해지자 녹스는 병든 몸을 이끌고 세인트자일즈의 설교단에 올라가 그 비극에 담긴 교훈을 잊지 말라고 열변을 토했다. 녹스는 세인트자일즈의 설교단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올라갔는데, 그것은 자신의 후계자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평가
존 녹스는 논란이 많은 인물이며, 그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도 학자들의 종교적·정치적 견해에 따라 다양하다.
종교개혁은 하느님의 뜻이므로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존 녹스의 확신은 많은 신도들에게 커다란 감화를 주어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를 세우는 반석이 되었다. 이성과 감정을 잘 융화시키는 설교가였으며, 연단에 서면 정열적이고 논리정연한 설교를 했다. 녹스가 다른 교파에 대한 포용력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칼뱅주의는 후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온건했다. 녹스의 행동은 말보다 온건했고, 그가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들은 평소와는 다른 그의 다감한 면을 보여준다.
자신이 의무로 믿었던 바에 대한 존 녹스의 변치 않은 일관된 헌신은 존경받을 만하며, 엄격한 신념에 따른 그의 도덕적 삶에 관한 많은 역사적 증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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