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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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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6세기초 북유럽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 교의(敎義)와 제의(祭儀)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한 그리스도교 교파의 한국 전파와 영향.

한국의 개신교

ⓒ Akoliasnikoff/wikipedia | GFDL

한국 개신교는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수용되었다.

우선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K.F.A.귀츨라프, A. 윌리엄슨, R.J. 토머스와 같은 선교사들이 개신교의 한국선교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들의 노력이 구체적인 결실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성서의 번역과 배포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873년 개신교의 한국선교에 뜻을 두고 만주에 왔던 J. 로스는 이응찬(李應贊)과 서상륜(徐相崙) 등 한국인들의 도움으로 성서를 번역하게 되었다.

1882년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번역된 것을 시작으로 〈예수강셰일쳔 십칠년〉이 번역되었고, 1887에 최초의 한글 〈신약성서〉인 〈예수셩교젼셔〉가 발간되었다.

이들 성서 번역자를 권서인(勸書人)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의 활동과 한글 성서를 통한 한국인들의 개신교 수용으로 인하여 1884년 봄에는 황해도 장연군 송천(松川:지금의 소래)에 한국인의 손으로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그리하여 한국 개신교는 선교사들이 활동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위상을 정립해가고 있었다.

성서의 한글 번역에 공헌한 또다른 사람은 개화파 지식인인 이수정(李樹廷)이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883년 입교한 후, 성서 번역을 시작하여 1885년 요코하마[橫浜]에서 〈마가의 전복음셔언〉을 출간하였다.

바로 이〈마가의 복음서〉를 가지고 H.G. 언더우드는 H.G. 아펜젤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한국에 온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여 각기 활동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장로교의 경우 미국의 남장로회와 북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등 4개 선교부에서, 감리교의 경우 미국의 남감리회와 북감리회의 2개 선교부에서, 선교활동을 추진하였다.

한편 침례교는 1889년, 성공회는 1891년, 안식교회는 1904년, 성결교는 1907년, 구세군은 1908년에 각각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 개신교의 선교정책은 각각의 선교부 특성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감리교는 주로 교육과 부녀사업에 치중하였으며, 장로교는 교회의 토착과 자립원칙의 선교정책을 수행했다.

장로교의 선교정책은 '네비어스 선교정책'(Nevius Method)으로 알려졌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자진전도(自進傳道 Self-Propagation)·자력운영(自力運營 Self-Support)·자주치리(自主治理 Self-Government) 등의 3대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구세군은 자선과 사회사업에 치중하였고, 침례교는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에 관심을 쏟았다. 교파에 따른 독특한 선교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의 선교전략은 몇 가지 공통점을 보이기도 하였다.

개신교 선교부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에 앞서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간접적인 선교활동에 상당한 노력을 쏟았다.

한국의 개신교는 선교활동의 초기 단계에서 같은 그리스도교이지만 개신교가 천주교(天主敎)와는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한국 천주교가 전교 초기부터 심한 교난(敎難)을 겪었음을 감안하여 처음부터 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선교사들이 한국 개신교의 초기 성장에 끼친 공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기록 속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언급되고 있는 수많은 전도인·권서인·전도부인 등 초기 개척자들의 영향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초기 개척자들에 의하여 그 기틀이 형성되어간 초기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과제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목표를 가지고 입교하였으며,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는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또한 1895년 11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과 1896년 9월 고종탄신일 축하예배 등을 통하여 왕실에 대한 충성을 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일제는 한국 개신교를 침략의 걸림돌로 지목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탄압을 가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국가의 비운에 직면한 한국 개신교는 물리적인 힘의 저항보다는 신앙적 차원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같은 해 1월 6일부터 10여 일간 평양의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행한 사경회(査經會) 기간 중 절정에 달한 이 운동은 1903년 이후 계속되어 온 선교사들의 기도회 모임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운동은 원산의 전계은(全啓殷), 정춘수(鄭春洙), R.A. 하디, 평양의 길선주(吉善宙) 등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 부흥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한국 개신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첫째, 한국 개신교가 신앙에 대한 체험적인 이해를 하게 되었다. 둘째, 한국 개신교의 공동체의식이 구체화되었다. 특히 이 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인 신자와 선교사 간의 이해가 크게 증진되었다. 셋째, 부흥사경회를 통해 개개인의 죄에 대한 고백은 한국 개신교와 교인의 도덕성 회복에 기여하였다.

마지막으로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성서공부와 기도가 더욱 고양되어 이와 같은 운동은 교세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1905년에는 321개였던 교회가 1907년에는 642개로 늘어났으며, 9,761명이었던 세례교인의 숫자 또한 1만 8,964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대부흥운동이 끼친 부정적인 영향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운동이 끼친 가장 큰 역기능으로는 한국 개신교의 비정치화(非政治化)와 몰역사성의 문제로 당시 한민족의 아픔을 종교적 차원에서 희석시켰다는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선교사들에 의하여 주도된 한국 개신교의 비정치화 경향과는 달리 일부 한국 개신교인들은 초기부터 계속되어온 민족운동의 전통을 지속시켜 나갔다.

이 시기의 한국 개신교의 민족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105인 사건'이었는데 이로 인해 윤치호(尹致昊)·이승훈(李昇薰) 등 개신교계와 신민회(新民會) 인사들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시적으로 교세가 위축되기도 했지만, 많은 일반 개신교인이 고초를 겪으면서 민족의식을 더욱 교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3·1운동을 계기로 다른 독립운동세력과 연대하여 적극적인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3·1운동에 있어서 한국의 종교계가 차지했던 비중은 상당했다. 그중에서도 천도교와 그리스도교가 보다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일제 헌병대의 자료에 의하면 1919년말까지의 3·1운동 관계 피검자 1만 9,523명 가운데 2,297명이 천도교인이었으며. 3,426명이 그리스도교인들이었다. 교인의 참여 비율이 높았던 만큼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 또한 극심했다.

일제의 물리적 탄압이 교회의 양적인 피해와 기능의 마비를 가져왔다면, 일제의 회유책은 교회의 질적인 변화와 정신적 피해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3·1운동 이후 한국 개신교의 신앙형태는 크게 2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김익두(金益斗)·길선주·이용도(李龍道)와 같은 부흥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된 초월적·신비주의적 신앙형태와, 적극적인 항일투쟁보다는 민족계몽운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역량을 강화한다는 현실적 계몽주의 신앙형태가 그것이었다.

한국 개신교의 사회참여 전통은 사회와 농촌운동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925년 장감연합협의회(長監聯合協議會)는 협의회 안에 사회부를 설치하여 사회운동에 착수했다. 농촌운동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와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29년 이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YMCA·YWCA의 연합으로 27개 지역에 농촌강습소가 개설되었다. 이밖에도 1923년 결성된 기독교여자절제회는 금주단연운동(禁酒斷煙運動)과 폐창운동(廢娼運動)을 벌였으며, 구세군은 자선사업을 벌였다.

1920년대 이후의 사회적 변화는 한국 개신교의 연합운동 필요성을 부각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교회의 사회대응 다변화를 가져와 교회 안에서 분파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교신(金敎臣)을 중심으로 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이용도를 중심으로 한 신비주의, 최태용(崔泰瑢)을 중심으로 한 복음교회 등이었다.

3·1운동 직후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표면적으로나마 완화된 정책을 보였던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강압적 통치정책으로 선회했다. 일제의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은 한국 개신교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신사참배의 강요였다.

일제의 강압에 굴복한 한국 개신교는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의 형식이라는 명분 아래 각 교단별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교단적 차원의 이러한 굴복과는 달리 몇몇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거부운동을 벌였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주도한 상징적 인물로는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있었다. 그가 시무한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신사참배거부운동의 결과 신학교가 폐쇄되고 수많은 교인들이 투옥되었으며, 50여 명의 교역자들이 순교했다.

일제통치 말기에 접어들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다. 1942년 언더우드를 마지막으로 선교사들은 추방당했으며, 조선예수연합공의회가 해산당했다. 1940년에는 침례교가, 1943년에는 안식교와 성결교가 폐쇄되는 등 한국 개신교는 실질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마침내 한국 개신교는 1945년 7월 19일 일제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8·15해방 직후 한국 개신교는 일제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교회의 재건을 도모했다.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은 6·25전쟁으로 다시금 위기에 직면했다. 민족분열의 위기상황 속에서 한국 개신교는 교회분열이라는 한계를 노출했다. 6·25전쟁중인 1951년 장로교의 고려파(高麗派)가, 1953년에는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가 분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감리교는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 감독 선출을 둘러싸고 총리원파와 호헌파가 분립했다.

이와 같은 교회의 분열은 전통교회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켜 소종파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박태선(朴泰善)이 주도한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천부교로 개칭)와 문선명(文善明)이 주도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 나운몽(羅運夢)의 용문산기도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의 분열과 소종파운동, 그리고 1960년대 이후의 사회적·정치적 변화에 직면한 한국 개신교는 심각한 자기반성을 해야 했다.

한국 개신교는 분열극복의 신학을 정립하면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벌였다. 에큐메니컬 운동, 즉 교회일치운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1966년 3월 8일 장로교의 초동교회(草洞敎會)에서 처음으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합동예배가 있었다. 1971년 부활절을 기하여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동번역한 〈신약성서〉가 출간되었으며, 1977년 〈공동번역성서〉가 출간되었다.

교회일치운동은 신학교육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1964년 4월 연합기관의 성격을 띤 연합신학대학원이 연세대학교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교회일치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한국 개신교는 또 한번의 분열을 경험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용공성(容共性) 여부를 둘러싸고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교단의 하나인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합동(合同)과 통합(統合)측으로 분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종파운동의 발생, 4·19혁명 이후의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경험한 한국 개신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참여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치제도의 경색화와 인위적인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불평등과 상대적 빈곤을 목도했다.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정당한 권위를 누리지 못하고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억압받는 현실을 돌파하기 위하여 민중신학(民衆神學)이 태동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의 일부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정교분리 이론을 바탕으로 정치와 사회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외면하면서 개인의 영혼구원에 보다 초점을 맞추기도 했다.

이는 한국 개신교에 처음부터 내재해온 보수성과 진보성이란 흐름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신학사상사에서 보수적 근본주의사상과 진보적 사회참여사상으로 나타났다. 한편 전통문화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을 시도해온 한국신학의 흐름은 종교적 자유주의 사상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 이후 나타난 한국 개신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교단의 양적 팽창을 들 수 있다.

교인의 숫자가 크게 늘어갔으며, 교회의 규모도 대형화되었다. 수십만 명이 모이는 대형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교회성장의 척도도 외적인 차원에 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국 개신교의 양적인 성장의 이면에는 1960년 이후 산업화 과정 속에서 상실된 자아를 확인받으려는 대중들의 종교적 동기가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때때로 그릇된 축복관이 교회를 지배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의 축복이 마치 물질적인 풍요와 질병 치료로 대표되는 것처럼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대형화와 외면화 경향에 반하여 교회의 참모습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국 개신교는 교회가 본래 담당해야 하는 교육·구제·전도·선교·사회봉사의 사명을 자각하고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이제 선교 1세기를 넘어선 한국 개신교는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의 한계를 뛰어넘고, 주체적인 자신의 위상을 정립해야 하고, 세계기독교사의 전면에서 자신의 자리를 매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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