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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범죄 수사에 과학적 방법의 이용은 필수적이다. 특히 화학 분석법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법화학’ 교재가 출판되고 있을 정도다. 화학을 비교적 많이 공부한 나도 이런 책을 들춰보면, ‘아! 그렇구나!’ 하고 감탄을 하게 된다. 화학 지식이 범죄 수사 현장에서 사용되는 예를 접하면서 화학의 광범위한 응용성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지금처럼 DNA 분석이 용이하지 않았던 시절에 있었던 살인범죄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하와이 어느 섬에 살고 있던 카리(Kari)가 갑자기 사라졌다. 가끔 가출한 경력이 있는지라, 몇 주가 지나서야 가족들이 그녀의 가출을 경찰에 신고하였고, 그 후로부터 몇 주가 더 지났을 때 집 근처 사탕수수 밭에서 사람의 뼈대가 발견되었다. 검시관은 도무지 누구의 시체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벌레들이 시체의 연조직을 다 없앤 후였기 때문이다. 군의 인류학 전문가들이 이 뼈대의 주인공은 코카서스 여인이고 나이는 45~48세이며, 허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밝혔다. 또 희생자의 이빨이 카리의 치과기록과 일치했기 때문에 그 희생자는 카리라고 단정했다.
살해혐의자가 있었지만, 수사관은 범인을 확인하기 위해 카리가 살해된 정확한 시각을 알아내야만 했다. 하와이의 더운 날씨에서 시체는 약 18일이 지나면 뼈대만 남는다. 카리의 행방이 분명치 않게 된 지는 한 달여 전이었으므로, 뼈대만 남도록 부패된 지 대략 16여 일이 지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시체와 함께한 파리, 풍뎅이, 유충 등을 조사해야 했다. 곤충의 발생학이 이때 크게 도움을 준다. 어떤 종들이 사체를 좋아하는지, 얼마나 빨리 접근해 오는지, 생장이 기온 등에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등의 치밀한 데이터에 의존한다. 분석은 법 곤충학자들의 몫이다. 사체에 있는 여러 유충을 수집해, 실험실로 가져와서는 조절된 환경에서 성충이 될 때까지 키워, 각각이 어떤 벌레의 유충이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한편 유충의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간의 비교도 중요하다. 각 유충의 성장속도와 곤충 및 벌레들의 성장속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사체가 얼마나 되었는지 추론한다. 물론 알이 유충으로 되는 속도에 관한 지식도 함께 요구된다. 이 모든 것들이 온도, 습도 등에 의존하므로 기후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필수적이다. 이런 정보는 파리 및 다른 벌레들이 언제 사체에 접근했는지를 산출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사례를 살펴보면, 호놀룰루의 한 대학의 리 호프 박사가 사체가 있던 곳에서 파리 두 종류, 투구벌레의 일종인 반날개 등 세 가지 곤충들을 찾아냈다. 첫째 파리는 흔히 부패 중인 사체가 15일쯤 되었을 때 찾아오며, 알이 부화하고 유충이 자라 파리가 되어 날아가는 데 21일이 걸리므로 카리가 사망한 지 36일은 지나지 않았다고 말해주었으나, 반날개는 보통 25일이 지나서야 사체에 다가오며, 사후 53일까지 사체에 머무르므로 사망 날짜가 25~36일 전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시간 차이는 너무 커서 수사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른 파리류는 사체가 20일 정도 부패했을 때 날아오며, 제일 큰 유충을 살펴보니 14일 정도 자란 것으로 유추되었다. 따라서, 이 정보들을 종합해 호프 박사는 사체가 발견되기 전 34~36일 사이에 살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수사관들이 혐의자로 의심하던 코리라는 중년의 독신남자의 주장은 이와 달랐다. 코리는 32일 전에 카리와 어느 바에서 함께 자리를 한 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고 주장했다. 이 날짜는 카리가 죽은 지 2일이나 지난 후였으므로, 수사관들을 코리집의 가택수색을 감행하였다. 지나치게 말끔히 청소가 된 집안을 수상히 여긴 수사관들은 카리의 혈흔을 찾기로 하였다.
이때 가장 흔히 사용하는 형광물질로 루미놀(luminol)이라는 화합물이 있다. 이 화합물을 과산화수소와 혼합하면 화학 반응이 일어나면서 형광이 나타난다. 보통 이 반응은 매우 느리지만 피 속의 헤모글로빈에 있는 철 성분이 촉매 작용을 하면 순식간에 형광이 관찰된다.
코리는 집을 철저히 청소해 혈흔을 모두 없앴다고 생각했으나, 화학수사를 이길 수는 없었다. 코리네 집 거실 바닥에 한 신체의 윤곽이 선명했고, 형광 자국은 문을 지나 코리의 자동차 트렁크에까지 선명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자기 집에서 살해한 후 트렁크에 실어 사체가 발견된 장소로 옮겼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코리의 주장은 우스꽝스러웠다. 자기 집에 있는 앵무새의 발톱을 너무 짧게 짤라 발가락에서 피가 났었고, 앵무새가 아파서 너무 광란을 했기 때문에 부득이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 동물병원으로 갔다고 고집을 부렸다. 안타깝게도 당시 남아 있는 혈흔은 너무 소량이었기 때문에 혈액형을 알 수 없었고, 지금처럼 극미량으로 DNA를 분석할 수도 없던 때였다. 현재의 화학 분석으로는 너무나 쉽게 알아낼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예전에도 범인들이 화학 수사망을 그리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코리집 방바닥에서 발견된 혈흔의 모습은 사람의 신체였지 앵무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범죄가 날로 늘어나는 현대사회에 머지않아 ‘법화학’은 화학도와 수사관의 필수과목이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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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화학 이야기와 친해지는 시간! 방사선 처리 식품의 안전, 현대인의 생활을 점령한 카페인, 페트병으로 만든 등산용 재킷 등 일상생활 속에 화학이 얼마나 깊이 자..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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