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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주방은 화학 실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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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이라는 과목이나 학문은 흔히 지지고 볶거나 끓이는 조리를 연상케 해서, 화학 반응을 행할 때 종종 cooking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도 그럴 것이 부엌에서 이루어지는 조리 과정을 살펴보면 화학 실험실에서 수행하는 실험 과정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분자 미식학(Molecular Gastronomy)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는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는다. 이 표현을 제안한 사람은 조리사가 아니고 놀랍게도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교수로 저온물리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펼치고 있던 니컬러스 커티 교수였다. 커티 교수는 퇴직한 후 과학 지식을 부엌의 조리에 적용하는 재미에 푹 빠졌으며, 조리는 결국 분자나 분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물리 화학적 변화를 컨트롤하는 과학의 일부라 생각해 1988년에 분자 미식학이라는 말을 처음 제안하였다. 뿐만 아니라 커티는 에르베 티스와 2002년부터 분자 미식학 워크숍을 격년으로 개최하기 시작했으며, 이 워크숍에는 요리사, 과학자와 기자 등이 참여한다. 에르베 티스는 세계 최초의 분자 미식학 박사학위 소지자로 커티 교수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 이 워크숍을 개최하고 있다. 또 한 가지 흥미 있는 이야기 거리는 티스가 프랑스 파리 대학의 장마리 렝(1987년 노벨화학상 수상) 교수 연구실에서 분자 미식학 그룹을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부터는 분자 요리학을 우리 가까이로 끌어오자. 우선 우리 주식인 밥과 쌀 이야기로 시작하자. 흔히 우리는 멥쌀로 밥을 짓고 찹쌀로 찹쌀떡을 만든다. 그런가 하면 쌀알이 더 기다란 소위 양쌀로 밥을 지으면 서양인이나 중국 사람들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이나 일본인들은 매우 싫어한다. 도대체 이들 쌀에는 무슨 차이가 있으며, 밥을 지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쌀에는 녹말(탄수화물)이 주성분으로 들어 있다. 물에 쌀을 담그고 끓이면 물 분자가 탄수화물 분자사슬을 적셔(화학에서는 수화시킨다고 함) 탄수화물 분자사슬간의 거리를 증가시킨다. 따라서 탄수화물 분자사슬 사이의 거리가 증가하고 그 사이 공간을 물 분자가 차지한다. 이때 물 분자 수에 따라 밥이 되기도, 죽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밥이 마르면 다시 본래 쌀처럼 단단해진다. 비록 쌀 모양을 100퍼센트 되찾기는 못하지만. 다시 말해 밥을 짓는다는 표현은 쌀 속의 녹말을 수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그르르한 양쌀 밥, 지나치게 차진 찹쌀밥, 고슬고슬한 우리네 쌀밥의 차이는 어디서 찾을까? 흔히 녹말이라고 부르는 탄수화물에는 아밀로오스와 아밀로펙틴이라는 두 종류가 있다. 아밀로오스는 분자가 선형이라 결정화가 잘 일어나며, 아밀로펙틴은 가지 친 구조여서 결정화가 잘 일어나지 않고 가지들끼리 서로 엉킨 구조를 쉽게 만든다. 모든 쌀은 아밀로오스와 아밀로펙틴을 지니고 있으나 이 두 성분의 상대적 함량에 차이가 있다. 양쌀에는 아밀로오스가 많으며 찹쌀에는 아밀로펙틴이 주성분이다. 양쌀에는 찰기를 더해주는 아밀로펙틴의 함량이 적으므로 밥이 다시 단단해지기 쉽다. 반대로 찹쌀은 아밀로펙틴의 엉킨 구조가 수분을 효과적으로 잡고 있을 수 있어 찰기를 오래 유지한다. 즉 녹말의 구성 성분과 및 물 분자와 상호작용 및 결정화의 용이도 차이가 각각의 쌀을 다르게 행동하게 한다.

다음으로 또 다른 주식인 녹색 야채를 살펴보자. 우리는 항상 야채를 데친 후에도 녹색을 유지하며 신선함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흔히 추천하는 방법이 화학적으로 볼 때 왜 옳은지 살펴보자. ‘물을 많이 사용하고 소금을 조금 넣어라. 물이 가볍게 끓거든 뚜껑을 열고 야채를 데치되 끓는 물에 7분 이상 담가두지 말아라.’ 그리 대단한 요령은 아니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을 지시하고 있다.

야채의 녹색은 엽록소 때문이며, 엽록소라는 화합물에는 마그네슘 이온이 결합하고 있다. 이 금속 이온이 빠져나오면 신선한 녹색이 사라지고 칙칙한 누런색으로 변한다. 이런 화학 반응은 야채 자체가 지니고 있는 산성 성분이 야기한다. 따라서 물을 많이 사용하면 채소에서 나온 산성분을 묽혀 반응을 감소시키며 소금을 넣으면 맛에 영향을 줄뿐 아니라 물의 끓는점을 높여 데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감소시킨다. 또 뚜껑을 열면 휘발성 산성분의 증발을 돕는다. 짧은 조리 시간은 반응 시간을 줄여준다. 이밖에도 가끔씩 소다를 넣고 데칠 것을 추천하기도 하는데, 산을 중화시켜 마그네슘 이온의 유출을 막아 주어 신선한 녹색을 유지하게 해준다. 그러나 식소다(탄산수소나트륨 ; 중조)를 너무 많이 사용하면 알칼리성이 된 물이 야채 세포막을 파괴하여 야채가 흐늘흐늘해지므로 조심해야 한다.

화학 지식의 응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옥텐-2-올이나 트랜스-2-메틸부텐산벤질을 조금 넣어주면 요리에 야생 버섯맛과 향을 돋아주고, 싸구려 위스키에 바닐라 소량을 넣으면 숙성된 고급 몰트위스키 맛을 낸다. 이에 덧붙여 유럽 일부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증류 장치, 믹서, 온도 조절 항온조 등이 주방에서 쓰이고 있으니 모든 주방이 화학 실험실같이 보일 날도 머지 않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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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일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 학사 및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69년 미국 뉴욕시립대학교에서 고분자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5년간 미국 스타우퍼케미컬사 연구소에서 연구생활을 한 후 1974년부터 ..펼쳐보기

출처

교실밖 화학 이야기
교실밖 화학 이야기 | 저자진정일 | cp명궁리 도서 소개

일상 속 화학 이야기와 친해지는 시간! 방사선 처리 식품의 안전, 현대인의 생활을 점령한 카페인, 페트병으로 만든 등산용 재킷 등 일상생활 속에 화학이 얼마나 깊이 자..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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