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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헤겔 학파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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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초기 헤겔주의의 발전은 지배적인 관심사가 무엇이었냐에 따라 헤겔이 살아 있을 때의 논쟁(1816~31), 종교 분야에서의 논쟁(1831~39), 정치토론(1840~44)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헤겔이 살아 있을 때의 논쟁(1816~31)

이 시기의 논쟁은 헤겔 학파 내에서의 논쟁이 아니라 주로 사변적 유신론자들, 요한 헤르바르트와 그 추종자들, 셸링의 제자들, 슐라이어마허 등 다양한 진영과 헤겔의 논쟁이었다.

헤르바르트는 헤겔이 합리론자인 스피노자의 일원론과 지식 일반의 가능 조건을 탐구한 칸트의 선험주의를 뒤섞어놓았다고 비난했다. 헤겔은 자신의 제자 헤르만 힌리히스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쓴 책의 서문에서 신앙과 이성은 내용에서는 같고 형식만 다를 뿐이라고 말했다. 즉 신앙에서는 표상이, 이성에서는 개념이 핵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헤겔 우파의 기관지인 〈과학적 비판 연보 Jahrbücher für wissenschaftliche Kritik〉(1827 창간)에 실린 8편의 논문이었다. 그중에는 헤겔이 예상과는 달리 철학과 복음적 정통이 양립할 수 있다는 테제에 찬성하는 내용의 비평문과 헤르바르트의 주장에 간접적으로 응답한 비평문이 있다. 라이프치히의 크리스티안 바이세와 이마누엘 피히테와 같은 사변적 유신론자들은 헤겔 철학을 범논리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사고와 경험을 자유로운 신, 즉 창조주의 개념 속에 통합하라고 제안했다.

헤겔의 가장 충실한 제자로는 헤르만 힌리히스와 카를 로젠크란츠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 대한 헤겔의 해결을 옹호했다.

종교논쟁 중심기(1831~39)

헤겔이 죽자 논쟁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복고 체제인 독일은 정치 토론의 개방을 금했기 때문에, 논쟁은 종교 영역으로 이동했고 영혼불멸론·그리스도론·일반 신학 등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헤겔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죽음과 불멸에 대한 고찰 Gedanken über Tod und Unsterblichkeit〉(1830)을 출간했다. 이 저작은 헤겔 체계가 범신론이라는 비난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범신론자이자 종교 비판가인 요한 프리드리히 리히터가 2권의 책을 출간하자 마침내 헤겔의 제자들이 나섰다. 그들은 수많은 변증법적 개념을 동원해 헤겔의 주장을 영혼불멸에 관한 전통적 주장과 화해시키려 했다.

영혼불멸에 관한 논쟁에서는 제대로 드러날 수 없었던 역사적 견해 차이가 성서 해석자이자 급진적 신학자인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의 〈예수 생애의 비판적 연구 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1835~36)의 출간을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성서 비평으로 얻은 관점에 서서 그리스도 본성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했다. 즉 그리스도론은 이제 더이상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원래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가, 그리고 문명 발전에서 그것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복음의 설명은 신화와 얽혀 있다. 신화는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시적 집단활동의 산물이다. 신화는 부분적으로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의 산물이고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억의 산물이고, 부분적으로는 현실적인 요소들이 변형된 결과이다.

신화의 목적은 철학과 종교의 내용이 같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고 유일한 진리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유일한 진리란 그리스도가 상징하고 있는 모든 인류의 정신 속에 나타나 있는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이 똑같다는 것이다. 슈트라우스의 저작은 활발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따라 우파(괴셸과 몇몇 사람들)·중간파(로젠크란츠)·좌파(슈트라우스)로 갈라졌다.

반헤겔 진영의 바이세는 〈복음의 역사 Die evangelische Geschichte〉(1838)에서 슈트라우스처럼 복음의 이야기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신비적이고 범신론적인 견해와는 달리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로고스의 육화(肉化)로 해석할 것을 제안했다.

한편 브루노 바우어는 복음 정통파 에른스트 헹스텐베르크와의 논쟁과 자신의 저서 〈계시의 역사에 대한 비판 Kritik der Geschichte der Offenbarung〉(1838)을 통해 좌파로 들어갔다.

1838년에는 좌파의 최초 기관지 〈독일과학과 예술을 위한 할레 연보 Hallische Jahrbücher für deutsche Wissenschaft und Kunst〉가 아르놀트 루게와 에히터마이어의 공동 편집으로 창간되었다. 처음에 이 잡지는 온건한 목소리를 유지했으며 중간파와 우파 헤겔주의자들도 글을 기고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루게가 청년 헤겔주의자들을 비난하던 사람을 공격하고 포이어바흐가 초기 헤겔주의자들을 공격하자 이 잡지는 민주주의적 자유주의 진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포이어바흐는 헤겔주의가 진리로 입증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감각적 현실과 지적 개념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겔주의 변증법은 세계와의 참된 매개를 상실한 '자신과의 독백'임이 드러났으며 헤겔 철학은 '이성적 신비'일 뿐이라고 포이어바흐는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제 필요한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논리학과 형이상학 분야의 문제들과 관련해서는 셸링에게로 관심이 모아졌다. 셸링의 영향을 받은 반헤겔적 비판들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들은 자율적 운동을 부여받은 순수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는 타당한 철학을 세울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셸링은 실재 자체를 발전의 주체로 볼 것을 제안했다.

무신론적·정치적 급진주의 시기(1840~44)

고전 철학자이자 문헌학자 프리드리히 아돌프 트렌델렌부르크는 〈논리 연구 Logische Untersuchungen〉(1840)에서 헤겔 논리학에 대해 중요한 비판을 가했다.

헤겔의 견해에서는 존재에서 무, 무에서 생성으로의 이행이 논리학의 '전제 없는' 순수한 출발점으로 정립될 수 있다. 그러나 트렌델렌부르크가 볼 때 이러한 이행은 의심스러운 경험적 전제를 그럴 듯하게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또 그는 헤겔이 A와 부정 A(~A)의 논리적 대립 혹은 모순을 A와 B 사이의 실재적 모순 혹은 반대와 혼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셸링은 신화학과 계시를 바탕으로 한 '적극 철학'을 계속 내세웠다. 따라서 셸링의 후기 철학은 좌파의 모든 비판의 과녁이 된 동시에 사변적 유신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셸링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고 실존주의의 창시자가 된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개인주의는 헤겔주의가 독일 밖으로 확산되면서 나타난 가장 초기의 중요한 사상이다. 그는 헤겔이 모든 대립을 변증법적으로 조화롭게 화해시키려는 동기를 갖고 있었고 삶의 진정한 이율배반에 대한 보편적·범논리주의적 해결을 모색하는 데 전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이율배반이 단독자로서 개인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고 개별적 인간은 결코 일반화될 수 없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이나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합리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인간의 구원은 사변철학의 합리적 가치들의 역설적인 전도(顚倒)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도약'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현존재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을 이루는 문제들은 어떠한 다른 용어로도 환원될 수 없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은 실존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이 시기에 중간파는 논리학과 역사 기술 분야에서 헤겔 체계를 수정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 인물인 쿠노 피셔는 변증법에서 존재와 무가 똑같이 정태적이고 상쇄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현실 운동은 존재와 무의 관계 속에 끼어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존재는 사고하는 존재로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등장하는 신헤겔주의 운동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견해에 응답하려는 시도의 결과였다.

1840년에 이르러 독일의 상황은 다시 보수화되어 자유언론과 반헤겔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운동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었다. 포이어바흐는 주요저서 〈그리스도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s〉(1841)에서 철학적 인간학을 확립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신적 속성으로 절대화된 인간 속성이 소외된 상징으로 해석했으며 신·삼위일체·성사·신앙 등의 개념에서 발견되는 신학의 모순들을 비판하면서 '인간이 인간에 대해 신이다'라는 명제를 최상의 원리로 하는 '새로운 종교'를 통해 인간 본질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브루노 바우어는 슈트라우스의 범신론적·신비적 실체 개념을 거부하면서 복음은 최초 공동체의 무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정신의 자기의식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1841~43년 독일 정부의 탄압 조치가 더욱 강화되어 브루노 바우어와 포이어바흐는 강의를 할 수 없었고 루게는 라이프치히를 떠나 프로이센에서 〈할레 연보 Hallische〉를 발간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그는 잡지의 이름을 〈독일 연보 Deutsche Jahrbücher〉로 바꾸었음). 그러나 이 시기에도 루게는 주요한 저작 〈헤겔 법철학과 우리 시대의 정치 Die Hegelsche Rechtsphilosophie und die Politik unserer Zeit〉(1842)를 펴냈다.

이 책에서 루게는 헤겔의 정치적 보수주의를 비난했으며, 헤겔의 사변적 이성은 현존 질서를 인정하고 현실을 개혁하려는 모든 노력을 배제하는 동시에 프로이센 국가를 이상국가의 전형으로 절대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공격했다. 루게의 잡지는 1843년초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루게는 그해 3월 스위스에서 〈최근 독일 철학과 정치적 저널리즘에 관한 일화집 Anekdota zur neuesten deutschen Philosophie und Publicistik〉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바우어·루게·마르크스·포이어바흐 등의 글이 실려 있다(정치철학). 다른 한편 포이어바흐는 〈미래 철학의 근본 원리 Grundsätze der Philosophie der Zukunft〉(1843)에서 사변철학의 방법은 주어와 술어를 전도함으로써 추상적인 것을 실체화하고 구체적인 것을 추상의 '논리적 우연'이나 속성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하면서 헤겔 철학의 부정을 통해 인간 본질을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헤겔 좌파는 서서히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엥겔스, 막스 슈티르너, 브루노 형제 등을 중심으로 한 '자유 베를린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사회적·역사적 문제들을 겨냥하면서 자기의식의 철학을 전개했다. 다른 한편에는 루게를 포함해 언론인 모제스 헤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카를 마르크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급진주의를 표방했으며 당시 등장한 사회주의를 수용했다. 따라서 이들은 헤겔을 끌어들여 당대의 정치적·문화적·철학적 상태를 비판했다.

본래 바우어의 친구였던 마르크스는 좌파의 민주 계열에 속해 있었다. 마르크스는 1843년에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서 헤겔이 프로이센 국가를 이상국가로 절대화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헤겔 국법론 비판 Kritik der hegelschen Staatsrechts〉(1843 여름, 1929)에서 헤겔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관념적으로 파악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했다.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독어판 1932)에서는 이미 헤겔 변증법이 선험적 성격을 띠고 있고 현실과 관련해 전도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구체적·역사적 현실을 신비화하고 소외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공격의 화살을 자신의 과거 동료들이던 헤겔 좌파에게로 돌려, 〈신성가족 Die heilige Familie〉(1845)에서는 바우어를, 〈독일 이데올로기 Die deutsche Ideologie〉(1845~46)에서는 슈티르너를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 관념이고 관념론으로 혁명운동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본 바우어와 슈티르너를 비판하고 역사적 유물론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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