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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 518/522, 그리스 중부 보이오티아 키노스케팔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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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BC 446 이후(BC 438경?), 아르고스 |
국적 | 그리스 |
요약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 에피니키온의 대가.
(라). Pindarus. (영). Pindar.
개요
에피니키온이란 피티아 제전, 올림피아 제전, 이스트미아 제전 및 네메아 제전에서 거둔 승리를 축하하는 합창용 송가를 말한다(합창 서정시).
초기교육
핀다로스는 스파르타의 아이게이스 가문 출신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의 부모는 이름만 남아 있는데, 아버지는 다이판토스이고 어머니는 클레오디케였다. 그에게는 스코펠리노스라는 숙부가 있었는데, 노련한 플루트 연주자였던 이 숙부는 핀다로스가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가족은 테베에 저택을 갖고 있었다(마케도니아 군대가 BC 335년에 이 도시 전역을 파괴했을 때, 핀다로스의 집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특별 명령으로 손상되지 않았음). 이런 출신 배경 덕분에 핀다로스는 다른 그리스 도시들의 귀족 집단에 언제든지 쉽게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의 시적 재능은 그에게 충분한 가르침을 주거나 용기를 북돋워줄 만한 것이 거의 없었던 고향 보이오티아보다는 다른 그리스 도시에서 훨씬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보이오티아의 두 여성 시인 미르티스와 코린나는 전혀 다른 전통(그보다 훨씬 소박하고 본질적으로 여성적인 전통)을 갖고 있었지만, 코린나는 핀다로스의 초기 문체가 보여준 지나친 미사여구를 비평하면서 그에게 "씨앗이 들어 있는 부대를 통째로 쏟아붓지 말고 손으로 씨를 뿌려라"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따라서 핀다로스가 훈련과 교육을 끝내기 위해 이웃 아테네로 보내진 것은 당연했다. 아테네와 테베는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귀족 가문들의 관계는 그런 장애를 초월했다.
그무렵 아테네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기 시작했고, 정치적·문화적으로 위대한 도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이런 도시의 자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핀다로스의 지평은 넓어졌을 것이다. 그는 과거에 합창용 서정시를 쓴 시인들(특히 알크만과 스테시코로스)과 그보다 나이가 많은 동시대인인 케오스의 시모니데스와 헤르미오네의 라소스의 작품을 공부했을 것이다. 그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에 몰두했을 것이며, 합창용 서정시의 기법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무렵 아테네에서는 주신찬가(酒神贊歌 : 합창용 서정시)가 장려되었고, 주신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종교축제의 일부로 공연된 연극적인 의식 무용에서 비극이 발전되기 시작했다.
작품활동
고대에 알려져 있던 핀다로스의 시는 모두 17권이며, 이 시들은 합창용 서정시의 거의 모든 장르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오늘날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4권의 에피니키온뿐으로, 이것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2세기에 한 교사가 교과서로 선정한 덕분이었다. 그밖에도 수많은 단편이 남아 있으며, 최근에 발견된 파피루스 고문서는 핀다로스의 업적, 특히 감사의 노래와 주신찬가(둘 다 합창용 종교 서정시)에서 그가 이룩한 업적을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모든 증거로 미루어볼 때 핀다로스의 대표작은 역시 에피니키온이다. 에피니키온은 그가 승리를 찬양한 경기 제전들의 이름을 따서 올림피아 송가, 피티아 송가, 이스트미아 송가, 네메아 송가로 나뉜다. 에피니키온의 수는 통틀어 44편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에피니키온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피티아 송가 제10편)은 BC 498년의 작품이며, 이 송가를 쓸 무렵 핀다로스는 자신의 표현 수단에 이미 숙달해 있었다.
그는 시모니데스처럼 그리스 세계 전체에 널리 알려진 예술가로 발전해, 그리스 세계의 각 도시를 돌아다니며 환영을 받았다. 핀다로스가 특히 델포이(피티아 제전이 열린 도시)와 올림피아에서 열린 범그리스 축제에 참가해 그가 찬양한 경기 제전과 승리의 분위기를 흡수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핀다로스는 또한 그가 노래한 승리의 주인공인 귀족들의 집과 참주들의 궁정도 직접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 대한 애정을 줄곧 간직했고, 테베에서 살기를 좋아했다. 핀다로스는 시에서도 그렇지만 도덕 규범이나 가치관에서도 오랫동안 거의 변함이 없었다. 이런 애국심은 희생을 의미했다. 테베는 델포이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 전쟁 때 적에게 협력했으며, 널리 인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테베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이 철수한 뒤 델포이는 곧 신망을 되찾았던 반면 테베의 배신은 쉽게 용서되거나 잊혀지지 않았다.
아테네는 BC 5세기의 역사를 지배하게 되었고, BC 5세기초부터 60여 년 동안 아테네는 오랫동안 질질 끈 테베와의 다툼에서 테베를 압도했기 때문에 BC 457~447년에 보이오티아는 사실상 아테네의 속국이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곳에서 핀다로스의 인격과 그의 예술에 없어서는 안 될 귀족적인 생활 방식이 위협을 받았다. 귀족 가문은 정치권력이나 경제적 세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급진적 합리주의는 극도로 이기적인 개인주의(이것은 '남들보다 뛰어나고 남들을 능가하기 위한'이라는 호메로스의 유명한 구절에 요약되어 있음)에 바탕을 둔 귀족정치의 규범을 무너뜨렸다.
합창용 서정시 자체는 별개의 예술 형태로서 더이상 발전할 가망이 없었다. 이 전통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비극에 흡수되었고, 핀다로스에게는 훌륭한 후계자가 전혀 없었다. 그는 당시의 이같은 문화적·정치적 발전을 경멸했거나 기껏해야 무관심했을 것이지만(그가 신들에 관한 전설의 일부를 재해석한 것은 별도로 하고), 그가 창조적 예술가로서 널리 존경과 인정을 받은 것은 그만큼 그의 시적 재능이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핀다로스의 초기시는 거의 분실되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고향인 보이오티아를 벗어난 다른 지역으로 점점 더 널리 퍼진 것은 신들을 찬양하는 찬가 덕분이었을 것이다. 핀다로스는 피티아 제전이 열리고 있을 때 태어났고, 젊은 시절부터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소에서 봉사하는 피티아 사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핀다로스와 그의 자손들은 델포이에서 특별한 특권을 누렸다. 델포이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가 앉아서 노래를 불렀다는 쇠의자 하나를 전시해두었다. 그에게 에피니키온을 지어달라고 주문한 고객은 초기에는 대부분 귀족들이었다.
테살리아의 알레우아스 가문(피티아 송가 제10편, BC 498), 아테네의 알크마이오니스 가문(피티아 송가 제7편, BC 486), 에피제피리안 로크리의 아게시디무스(올림피아 송가 제11편, BC 484),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이기나 섬의 아이아키스 가문(이 연작 송가는 BC 490년에 감사의 노래 제6편으로 시작하여 네메아 송가 제7편으로 이어짐)이 주요고객이었다. 그의 명성은 느리지만 꾸준히 높아진 것 같다. 아그라가스의 참주 테론의 아우인 크세노크라테스가 티니아 제전의 전차 경주에서 우승했을 때, 핀다로스는 그 승리를 기념하여 피티아 송가 제6편(BC 490)과 피티아 송가 제12편(BC 490)을 지었고, 크세노크라테스를 통해 테론의 궁정과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관계가 미처 열매를 맺기도 전에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략했고, 핀다로스는 어느 쪽에 충성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는 친페르시아 정책을 취한 보이오티아의 귀족들에게 연대감을 느끼면서도 스파르타 및 아테네의 영웅적 저항을 점점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핀다로스는 무엇보다도 우선 테베인이었으며, 친구들을 지지했다. 그의 친구들 가운데 많은 수가 페르시아를 편든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승리를 기뻐하고 그리스의 영예로운 전사자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쓴 사람은 핀다로스가 아니라 시모니데스였다.
핀다로스가 명성을 되찾는 데는 몇 년의 세월이 걸렸다.
다행히 아이기나에 있는 친구들은 확고하게 그를 지지했다(이스트미아 송가 제8편, BC 478). 그가 BC 476~474년에 시칠리아 섬을 방문해 아크라가스의 참주 테론과 시라쿠사의 히에론 1세의 궁정에서 환영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 그의 가장 훌륭한 시는 대부분 이곳에서 씌어졌고, 이 참주들과의 관계를 통해 핀다로스의 명성은 그리스 전역에 널리 퍼져 본토와 섬들만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헬레니즘 문명의 전초기지에서도 주문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다.
마케도니아왕가(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단편 120)와 키레네 왕가(키레네의 아르케실라스, 피티아 송가 제4·5편, BC 462/461)와도 새로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생겼다. 테론과 히에론은 핀다로스를 존경하고 아꼈지만, 그는 군주들 앞에서도 거침이 없었고 솔직했다. 아첨할 줄도 술수를 부릴 줄도 모르는 귀족적 기질 때문에 그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노련한 경쟁자인 시모니데스와 바킬리데스는 그보다 융통성이 있고 나긋나긋했다. 히에론이 BC 468년에 올림피아 제전의 전차 경주에서 우승했을 때, 그 승리를 축하한 사람은 핀다로스가 아니라 바킬리데스였다. 여기에 분개한 핀다로스의 마음은 그의 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핀다로스가 키레네에서 망명한 귀족 다모필로스를 위해 문제에 개입한 것(피티아 송가 제4편)도 군주의 미움을 산 것 같다.
그결과 그는 BC 460년에 아르케실라스가 올림피아 제전에서 우승한 것을 축하해달라는 요청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뛰어난 업적을 이룩했고, 핀다로스에게 시를 써달라는 주문은 계속 늘어났으며 그의 솜씨도 점점 더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는 유명한 찬사(단편 76)로 아테네에 진 빚을 충분히 갚았다. 아테네 사람들은 싫증도 내지 않고 이 찬사를 수없이 인용했으며, 이 찬사 덕분에 시인은 그 도시에서 특별한 명예를 얻었다(옛 전설에 따르면 테베에서는 벌금형을 받았음). 핀다로스가 결혼한 것은 이 무렵일 것이다.
그후 아테네가 그리스 중부를 지배한 시기는 그리스 북부의 포키스가 델포이를 지배한 시기와 일치했다. 핀다로스에게는 암울한 시절이었고, 그는 시를 많이 쓰지 못했다. 그러나 테베의 승리를 계속 찬양했고(이스트미아 송가 제1·7편), 친구인 아이기나의 아이아키스 가문(그들이 명목상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분명했지만) 사람들의 업적에서 영감을 얻었다(이스트미아 송가 제5·6편과 네메아 송가 제3~8편, 이 시들은 모두 아이기나의 승리를 축하한 것임). 오늘날 남아 있는 핀다로스의 마지막 시(피티아 송가 제8편)는 아이아키스 가문의 승리를 축하한 것이다.
핀다로스가 80세까지 살았다는 전설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BC 446년 이후의 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에피니키온이라는 시 형식은 시모니데스가 사실주의와 익살을 가미하여 비교적 단순한 기쁨의 시로 발전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핀다로스는 이 형식을 종교적 찬가에 적용했다. 축제의 주인공인 신에 대한 찬미와 경배가 시의 음조를 결정했고, 감사의 말은 시의 구조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다.
2번째 구성 요소는 신화로서, 짤막하고 생생하게 인상주의적으로 묘사된 일련의 장면으로 다루어져 있으며, 영광스러운 현재를 그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과거와 연결하여 덧없는 승리의 순간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3번째 구성 요소는 미덕을 드높이기 위한 경구이다. 핀다로스는 대개 극단적인 아름다움, 때로는 숭고함을 경구의 주제로 삼아 성취에 대한 지나친 자만심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충동적인 감정은 자기 주장과 경쟁 및 지도자의 지위라는 귀족들의 이상에서 나온다.
이런 이상은 전투에서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지만, 고귀한 태생 덕분에 뛰어난 육체와 정신을 가진 사람이 승리를 얻게 되는 운동경기에서도 이루어진다.
핀다로스의 운율은 그 범위가 매우 넓어서 같은 운율을 가진 시가 하나도 없으며, 그는 까다롭고 복잡한 기법을 전문가의 솜씨로 능숙하게 다루고 있다. 그의 방언은 절충적인 문어이며 보이오티아 방언의 요소는 거의 없다. 어휘는 풍부하고 시적이며 개성적이다. 핀다로스의 시적 영감, 그의 시에 힘과 웅장함을 부여하는 넓고 높은 상상력, 강한 개성적 문체를 이용하여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예술 작품을 만들고 다루는 훈련 등이 그의 시를 하나의 통일체로 만들고 있다.
핀다로스는 델포이의 종교적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시의 소재에 항상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조잡한 신들의 이야기를 거부하고, 경기에 대한 평범한 세부 묘사를 피했으며, 한 인간이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신의 가문과 조상에 어울리는 인물임을 입증하는 절정의 순간, 그 극한적인 노력의 순간에 찬란하게 빛났다가 사라지는 덧없는 빛을 포착하려고 애썼다.
델포이는 또한 불가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그의 문체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자신을 뮤즈의 예언자로 생각했다. 뮤즈는 신탁을 전하는 무당이며, 그는 신의 계시를 받은 뮤즈의 예언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사제이다. 핀다로스 이외에 보이오티아가 낳은 중요한 시인은 BC 8세기에 활동한 헤시오도스뿐이었다. 두 사람의 출신 배경과 기질은 전혀 다르지만, 둘 다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의 예배가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심오하고 만족스러운 무엇인가를 모색했으며, 생각과 감정의 갑작스럽고 격렬한 변화를 좋아했고, 솔직하고 통렬한 말을 즐겨 사용했다. 〈그리스 사화집 Greek Anthology〉에 보존되어 있는 비문은 핀다로스를 이방인들에게 환영받고 동료 시민들의 사랑을 받은 뮤즈의 하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마 시인은 이 비문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독자들이 핀다로스의 송가를 읽고 이해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그의 예술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였다. 이른바 핀다로스풍 송가는 영문학에서 훌륭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이 송가는 핀다로스의 문체와 기법을 거의 완전히 오해하고 잘못 해석한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증거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시의 반주음악으로 작곡한 곡은 영원히 사라졌지만, 시의 성격을 고려하면 시가 반주음악을 지배했을 것이다. 그리스 서정시는 대부분 그러했을 것이다. 따라서 상상으로도 대체로 핀다로스풍 송가에 가까운 소리를 재현하기는 불가능하고, 합창단의 겉모습과 구성을 시각적으로 복원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얼마나 많은 인원이 참여했는지, 어떤 음역의 성부를 채택했는지, 가수들이 가만히 서서 노래를 불렀는지 아니면 행진하거나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는지, 이런 질문에는 이제 대답할 수가 없다. 시의 배경인 축제를 명확하게 묘사하는 것도 역시 불가능하다. 그러나 송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 뒤에 숨어 있는 시인의 모습을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보답을 받는다.
핀다로스에게 모든 것을 의미했던 귀족 사회와 구성원들의 규범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핀다로스는 예술에서 그것을 재현했고, 거기에 새롭고 영원한 존재와 가치를 부여했다.
그리스 합창용 서정시의 전통은 핀다로스의 송가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송가를 평가하거나 감상하기도 어렵지만, 송가를 지은 시인을 이해하거나 평가하기는 훨씬 더 어렵다. 그의 동시대인들에게도 핀다로스는 초연하고 약간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시인이 되기보다는 시의 후원자가 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의 고향은 그리스의 다른 지역에 비해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여가 미약한 곳이다. BC 4, BC 3세기에 씌어진 그의 전기들은 신빙성이 없고 또 도움도 거의 주지 않기 때문에, 이 시인에게 좀더 가까이 접근하려면 그의 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접근 방식은 그의 예술 형성에 이바지한 역사적 배경과 종교적 관습 및 문학적 관례에 대한 고려를 필요로 한다. 핀다로스의 주제(운동 경기나 전차 경주에서 거둔 승리)가 진지하고 심오한 감정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어떻게 영감을 줄 수 있었는가를 오늘날의 독자들이 이해하려면, 우선 그리스 귀족 사회의 성격과 전통에 대한 공감 어린 통찰이 필요하다.
핀다로스는 사실 수십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처럼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는 정교하고 복잡한 예술 형태를 능숙하게 다룸으로써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웅대하고 고귀한 합창용 서정시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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