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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도비츠

다른 표기 언어 Joseph Maria von Radowitz
요약 테이블
출생 1797. 2. 6,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하르츠 블랑켄부르크
사망 1853. 12. 25, 베를린
국적 프로이센

요약 프로이센의 보수적인 외교관, 장군.

프로이센의 주도로 1847년부터 독일을 통일하려고 노력했던 최초의 정치가이다. 이는 나중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룩한 통일정책보다 2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823년 프로이센 군대에 들어갔다. 왕세자(뒤에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의 우정과 명석한 두뇌 덕분에 빠른 속도로 진급을 계속해 1830년에는 포병 참모장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낭만적인 보수주의자였으며 레오폴트 폰 게를라흐와 에른스트 루트비히 폰 게를라흐 형제가 중심이 되어 만든 보수파 단체의 회원이 되었다.

1836년 '독일 연방'의 프로이센 군사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나 곧 이 연방이 거의 쓸모가 없을 정도로 나약하다고 확신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한 일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프랑스를 최대의 적이자 위협적 존재라 여기고 강력한 독일을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1848년의 혁명으로 그에게 기회가 왔다. 1848년 3월부터 1849년 4월까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대표로 일하면서 극우파를 이끌었으며 군사적 지식과 종교적 신념으로 곧 '호전적인 수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프로이센 주도로 오스트리아까지도 포함하는 구속력이 약하지만 광범위한 연방을 형성할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제안한 황제의 관을 거부한 뒤로, 라도비츠는 국민의 대표보다는 독일 제후들과의 합의를 통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그는 비록 각료는 아니었지만, 당시 프로이센 대외 정책을 거의 단독으로 이끌었으며 프로이센 주도권을 인정하는 독일 국가들과 연합을 형성했다.

1850년 이 연합 대표들이 모인 에어푸르트 의회에 프로이센 대표로 참가하여 프로이센의 주도권을 인정하도록 설득하려 애썼으나 오스트리아·러시아·독일 국가들뿐 아니라 보수적인 프로이센 내각의 반대에도 부딪혔다. 그뒤 오스트리아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제국의회(Diet)를 부활시키고, 1850년 가을에는 혁명이 휩쓸고간 헤센-카셀을 침략하겠다고 위협했다.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만 그를 지지하는 가운데 그는 프로이센의 총리가 되었고(1850. 9) 전쟁을 준비했다. 이 전쟁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프로이센이 올뮈츠 협약(1850. 11. 29)에서 오스트리아의 요구조건을 수락함으로써 겨우 피할 수 있었다.

그는 11월 3일 사임했고 아울러 그의 정책도 폐기되었다. 그뒤 영국으로 가서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851년 전역했으나 이듬해 감찰총감으로 다시 군에 돌아왔다. 프리드리히 빌헬름과는 우정을 계속 유지했으나 더이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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