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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샤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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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스위스 역사에서 유럽 열강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건(1856~57).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영토문제를 전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1814~15)에서 뇌샤텔(노이엔부르크)은 2중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결정했다. 즉 뇌샤텔은 새로 성립한 스위스 연방의 주(州)로 편입되는 동시에 프로이센 왕국과는 별도로 프로이센 왕이 개인적으로 상속하는 공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뇌샤텔 사람들은 이 결정에 불만을 품었고, 1848년 3월 스위스가 헌법을 개정하고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가 모두 혁명운동에 뒤흔들리고 있을 때 반란을 일으켜 공화제를 확립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자기 왕국에서 일어난 골치아픈 문제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852년, 프로이센을 제외한 유럽 열강들은 런던 의정서에서 프로이센 왕이 뇌샤텔에 관한 권리가 있음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대신 프로이센이 그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반드시 그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1856년 9월, 뇌샤텔에서 푸르탈레스 가문이 이끄는 왕당파 귀족들이 친프로이센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쿠데타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그들을 석방해달라고 스위스 연방의회에 호소했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중재역할을 부탁했다. 스위스는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역자들을 재판해야겠다고 고집했으므로 프로이센은 스위스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받는 독일 남부 국가들이 프로이센 군대가 자신들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락할지 의심스러웠고 영국과 프랑스는 스위스를 지원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857년 1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과 협상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를 스위스에 유리하게 매듭지을 것이니 죄수들을 잠시 추방하는 형식으로 석방하라고 스위스를 설득했다. 1857년 3~4월 파리에서 중립 열강들의 회의가 열린 뒤, 1857년 5월 26일에 협정을 조인했다. 이 협정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공(公)이라는 칭호만 유지한 채 뇌샤텔 지배권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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