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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1918년의 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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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이 지나면서 개혁에 대한 열의는 사그라들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1815년 5월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군대도 사기를 많이 잃어버렸다. 한편 프로이센의 교육제도는 여전히 유럽에서 최고였으며, 특히 베를린대학은 어떤 대학보다도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왕국의 서쪽 지방은 프로이센의 영토가 된 적이 없는 곳이었으며, 주로 로마 가톨릭교도들로 이루어진 이 지역들은 프로이센과는 이질적이어서 교회와 국가 사이에는 격렬한 갈등이 자주 일어났다. 프로이센의 관료제는 능률성과 청렴함에서 높은 수준을 이루었는데 이것은 당시 유럽에서는 독특한 현상이었다.

1818년 통관세를 낮춘 단순화된 관세제도가 왕국 전역에 시행되었고 이 관세제도는 1852년 오스트리아와 함부르크를 제외한 전독일 지역으로 확대된 1834년 관세동맹(Zollverein)의 모태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840~61 재위)는 낭만적인 인물로, 자신이 생각하는 중세에 대한 모습을 프로이센에 되살리기를 열망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분쟁을 끝냈고 1844년 몇 세기에 걸쳐 완성된 쾰른 성당의 준공 기념식에 참석해 프로이센 국왕으로서는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 건물로 들어갔다.

그는 입헌정치에는 반대했으나 중세와 비슷한 형태의 신분제를 몹시 만들고 싶어했으며, 처음에는 독일 의회를 만드는 데 지지를 보냈으나 나중에는 입장을 바꾸었다.

1848년 3월 독일에서도 프랑스 2월혁명에 자극을 받아 혁명이 일어났다. 군대가 나서서 이 소요를 진압했으나 겁을 먹은 국왕은 3월 19일 베를린에서 군대를 빼내고 한때 자신이 직접 혁명의 선봉에 섰다. 자유주의 정부가 들어서고 제헌의회가 소집되기도 했으나 자유주의 운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군대가 다시 베를린으로 들어왔고 의회도 12월 해산했다. 그러나 1850년 2월 국왕은 마침내 칙령을 내려 헌법을 제정했으며 이 헌법은 1918년까지 존속했다. 1848년 혁명이 벌어지는 동안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독일 통일운동을 주도하겠다는 열망을 갖고 1849년 4월 3일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모인 대표자들이 그에게 제의한 독일 제국의 황제 자리를 받아들일 생각도 했으나 보수적인 신하들의 설득으로 결국 이를 단념했다. 그러나 그후에도 그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국가들의 결합체인 '에르푸르트 동맹'을 수립하려고 했다.

1850년 오스트리아는 이 연맹안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전쟁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보수적인 신하들은 오스트리아와 올뮈츠 협약(1850. 11. 29)을 맺고 이같은 야심을 포기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1857년 정신이 이상해졌기 때문에 동생이 1858년 섭정이 되어 국사를 대신 처리하다가 1861년 형이 죽자 빌헬름 1세로 왕위에 올랐다.

빌헬름 1세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公)이자 가톨릭교도인 카를 안톤을 총리로 하는 자유주의 내각을 임명했고, 프로이센은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여 독일을 주도할 국가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군사예산과 이로 인한 과세 문제를 놓고 왕과 의회 사이에 반목이 일어났고, 이러는 가운데 1862년 9월 총리가 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에 대해 교묘한 논리를 폈다.

헌법에 따르면 예산은 상·하 양원과 국왕이 모두 동의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비스마르크는 하원이 상원과 국왕의 입장에 끝내 동조하지 않자 "헌법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동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예산 없이 재정지출을 하는 것은 국왕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자금을 확보했고, 1863~64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놓고 덴마크와 분쟁이 일어났을 때 하원은 끝까지 군사예산을 인준하기를 거부했으며, 결국 프로이센은 덴마크와 싸우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1866년 '7주전쟁'에서 오스트리아에게 승리하자 헌법을 놓고 일어난 이러한 위기를 끝냈다. 비스마르크는 불법 지출에 대해 사과했으며 상·하 양원은 9월 면책법을 통과시켰다.

1864년에 벌어진 덴마크 전쟁으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지방을 공유하게 되었다. 7주전쟁을 통해 이곳뿐만 아니라 하노버를 비롯해 헤센·나사우·프랑크푸르트암마인과 같은 지역을 얻은 프로이센은 막히는 곳 없이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해 전체 독일 지방의 2/3와 독일 인구의 2/3를 차지하게 되었다.

프랑스와의 전쟁(1870~71)으로 프로이센은 새로 수립된 제국의 맹주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는 독일 황제로 즉위했고 프로이센군은 다른 독일 국가의 군대를 모두 흡수했다. 단지 바이에른 왕국의 군대만 평화시에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의 총리이자 프로이센의 총리가 되었고, 이후 프로이센 역사는 주로 독일 제국의 역사가 되었다.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여 독일 제국과 프로이센 왕가가 몰락하자 프로이센의 패권도 끝이 났다.

베르사유 조약과 그에 따른 국민 투표의 결과 프로이센은 슐레지엔·포젠(포즈나니)·서프로이센·단치히(그다인스크)·메멜(클라이페다) 및 슐레스비히 일부를 잃었으며 벨기에 국경지대에 있는 일부 지역과 자를란트도 잃게 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일개 주(Land)로 전락했다. 또한 전에 비해 권한이 약해져 독일 정치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뒤에도 행정단위로 그대로 남아 있기는 했으나 헌법은 무효화되고 의회는 해산되었다.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미국·소련·프랑스 등 4대 전승국의 통치를 받게 되어 동프로이센 북부는 소련에 병합되고, 오데르-나이세 강 동쪽에 있는 지역은 폴란드로 넘어갔으며, 그 나머지 지역은 소련·영국·프랑스가 각각 분할 점령했다. 1947년 3월 1일 연합국점령위원회가 내린 조치로 프로이센은 공식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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