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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낭만주의와 그 이후
19세기에는 포르투갈 문학의 전반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낭만주의의 주요주창자들은 시와 극에서는 주앙 바티스타 데 알메이다 가레트, 산문에서는 알렉산드레 에르쿨라누였는데, 두 사람은 모두 정치적 자유주의로 인해 몇 년 간 국외로 망명했다. 알메이다 가레트는 영국 및 프랑스 문학을 읽고, 2편의 서사시 〈카몽스 Camões〉(1825)·〈도나 브란카 Dona Branca〉(1826)를 써서 포르투갈에 국민주의적 낭만주의를 소개했다.
절반은 낭만주의자이고 절반은 고전주의자였던 안토니우 펠리시아누 데 카스티요는 젊은 세대의 시인들인 주앙 데 레모스, 소아레스데 파수스, 투마스 리베이루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투마스 리베이루는 애국적 열정을 담은 작품 〈돔 자이메 Dom Jaime〉(1862)로 유명하다.
1865년 독일 철학과 시를 공부하던 학생 안테루 데 켄탈과 오귀스트 콩트의 신봉자인 테오필루 브라가는 카스티요의 우위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문학 특히 시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었다. 주앙 데 데우스의 〈꽃밭 Campo de Flores〉(1893)에는 포르투갈어로 씌어진 자연스럽고 소박한 가장 훌륭한 단시 몇 편이 실려 있다. 아비리우 마누엘 게라 중케이루는 빅토르 위고를 본받아 사회적 혁명가를 자처했으며 장광설을 늘어놓는 경향이 있었다.
〈소박한 사람들 Os Simples〉(1892)에서 그는 농촌 생활에 대한 묘사로 돌아갔는데, 이 작품은 그의 가장 뛰어난 서정시로 꼽힌다. 그와 동류인 안토니우 두아르테 고메스 레알은 〈남쪽의 청명함 Claridades do Sul〉(1875)·〈그리스도의 적 O AntiCristo〉(1884)을 썼으며, 소박한 주제들을 다룰 때조차 조용한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안토니우 칸디두 곤살베스 크레스푸는 포르투갈 고답파 시인의 제일인자이다.
반면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여겨지는 세사리우 베르데는 일상적 현실의 시적 본질을 추구했다. 안토니우 노브레의 〈홀로 Só〉(1892)는 주제·분위기·운율 등에서 상당히 포르투갈적이다. 그와 테이셰이라 데 파스코아이스는 회고주의(saudosismo)에 대한 숭배를 일으켰으며, 이는 시의 한 유파로까지 발전했다. 에우제니우 데 카스트루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극·소설·역사
극을 활성화하려 노력했던 알메이다 가레트는 극장·희곡·배우·관중 등을 모두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질 비센테의 아우투 Um Auto de Gil Vicente〉(1838)·〈산타렘의 대장장이 O Alfageme de Santarém〉(1841)·〈수도사 루이스 데 소사 Frei Luís de Sousa〉(1843) 등의 작품에서 그는 자신이 비센테의 뒤를 잇는 포르투갈의 대표적 극작가임을 입증해보였다. 주앙 다 카마라는 당대의 탁월한 극작가였으며, 그의 작품으로는 〈아폰수 6세 Afonso Ⅵ〉(1890)·〈버림받은 장미 Rosa Enjeitada〉(1901)·〈노인들 Os Velhos〉(1893) 등이 있다.
유배지로부터 월터 스콧 경에 대한 열정을 품고 돌아온 에르쿨라누는 〈수도원 이야기:장로 에우리쿠 O Monasticon:Eurico, o presbitero〉(1844)·〈전설과 이야기들 Lendas e Narrativas〉(1851)을 써서 역사적 로맨스를 출발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뒤따랐는데, 그중에는 올리베이라 마레카, 아르날두 다 가마, 피녜이루사가스 등이 있었고,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는 루이스 안토니우 레벨루 다 실바의 〈D. 주앙 5세의 젊은 시절 A Mocidade de D. João V〉(1852), 주앙 데 안드라데 코르부의 〈궁정에서 보낸 1년 Um Ano na Côrte〉(1850~51)이 있다.
이 시대는 소설의 전성기였다.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 조아킴 고메스 코에유(줄리우 디니스로 더 잘 알려짐), 그리고 특히 주제 마리아 에사 데 케이로스 등은 어느 나라에서나 명성이 높았다.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는 언어구사와 극적, 즉 멜로드라마적인 줄거리에 뛰어났고, 줄리우 디니스는 〈세뇨르 레이토르의 생도들 As Pupilas do Senhor Reitor〉(1867)에서처럼 시골생활을 묘사했으며, 에사 데 케이로스는 〈아마루 신부의 죄악 O Crime do Padre Amaro〉(1876)이라는 작품에서 사실주의를 도입했다.
에르쿨라누는 대작 〈포르투갈의 역사 História de Portugal〉(1846~53)·〈포르투갈 종교재판의 기원과 수립의 역사 História da Origem e Estabelecimento da Inquisião em Portugal〉(1854~59)로 근대 포르투갈 및 스페인 역사가들의 태두가 되었다.
역사 저술을 더욱 풍부하게 한 것은 코르테스의 역사가 비스콘데 데 산타렘, 주제 시망 다 루스 소리아누(입헌제 시절), 레벨루 다 실바(스페인의 펠리페 치하), 주제 마리아 라티누 코에유(폼발의 독재시절) 등이었다. 엔리케 다 가마 바로스와 안토니우 다 코스타 로부는 에르쿨라누를 그대로 답습했다. 조아킴 페드루 데 올리베이라 마르틴스는 심리학적 상상력, 뛰어난 일반적 사고력, 회화적 서술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저작들, 특히 〈근대 포르투갈 역사 Portugal Contemporâeneo〉(1881)에서 포르투갈의 수많은 저명인사들을 생생히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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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19세기 포르투갈 문학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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