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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아시아의 회화는 암각화·벽화·모자이크·세밀화·두루마리그림 등의 형식으로 구분되며 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회화는 역시 암각화이다.
구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제작된 이들 암각화는 남러시아 일대,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등의 분포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사냥 장면의 인물상과 동물상 등이 주요 주제를 이룬다. 우즈베키스탄의 테르메스에서 약 60㎞ 떨어진 바바탁 산에서 발견된 후기 구석기의 암각화에는 무엇보다도 황소를 향해 활을 쏘는 인물이 묘사되어 있어 주목되고 있다.
한편 벽화는 사원(석굴)벽화·궁전벽화·무덤벽화 등으로 나뉘는데, 그 중 불교문화를 반영한 사원벽화가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현상은 중앙 아시아가 불교 전파의 중요한 통로였으며 불교 자체가 강력한 예술적 표현을 동반하고 있는 데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사원벽화들은 대체로 1세기 이후의 것들이며 늦은 시기의 것으로는 둔황 벽화의 마지막 작품이 제작된 14세기까지 연장된다.
중앙 아시아를 통틀어 초기의 불교 벽화로는 카라테페에서 1㎞ 떨어진 파야스테페 사원에서 발굴된 1~3세기경의 〈여래상〉(타슈켄트 역사박물관)을 들 수 있다.
불상의 안면과 그 주변에 서 있는 작은 인물들로 구성된 이 벽화는 사실적 표현의 기초 위에 명암법을 써서 채색을 가한 흔적이 뚜렷하여 어느 정도 로마 벽화의 영향을 감지하게 한다. 이와 같은 사원벽화 외에도 서투르키스탄에서의 벽화는 매우 다양하다. 이란의 고대왕국인 파르티아(BC 4세기~AD 3세기)의 쿠이초차 지방의 궁전벽화는 1세기경의 작품으로서 인물 중심의 종교적인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인물 주변에는 그리스의 메안더 문양, 아칸서스 문양 등 서방적인 모티프와 함께 날개 달린 에로스와 같은 순수 헬레니즘적인 근원도 엿보인다.
2세기의 두라유로포스 고분벽화는 기마인물이 활을 쏘며 짐승을 추격하는 전형적인 사냥 장면인데, 동작 표현에 비해 운동감이 없고 생동감이 결여되어 있다. 이 벽화는 일종의 서원화(誓願畵)로서 그리스풍의 모델을 따르고 있지만, 그 표현은 전형적인 이란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이란의 회화는 사산조(226~651)의 모자이크 바닥 장식화로 대표된다. 이 모자이크 그림은 로마 미술의 영향으로 시작된 것이다.
3세기 후반의 비샤푸르의 모자이크는 그 모티프를 안티오크의 모자이크 제작소에서 따온 것인데도 세부표현은 분명한 이란풍을 보여준다. 또한 이 모자이크의 명암표현은 후에 동투르키스탄 석굴벽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소그디아나의 회화는 그들 문화의 전성기인 7~8세기에 제작된 벽화가 대종을 이룬다(소그디아나 예술). 이것들은 당시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를 비롯해 근교의 아프라시아브, 펜치켄트, 서부의 바라흐샤 등의 도시들에 남아 있는 사원, 궁전, 주거 건물 등의 벽면을 장식한 그림들이다.
펜치켄트 주거 벽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영웅 루스탐의 전설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벽화에서 말을 타고 있는 인물들은 묘사의 평면성에도 불구하고, 배경을 라피스 라즐리의 푸른색으로 칠함으로써 대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1965년에 발굴된 아프라시아브의 궁전벽화에는 7세기말 당시 주변국가의 사절단이 묘사되어 있는데, 특히 조우관(鳥羽冠)을 쓴 2명의 한국인 사절이 등장하여 흥미를 끈다. 카불의 서북쪽으로 177㎞ 떨어진 곳에 있는 바미안은 힌두쿠시 산맥의 한 줄기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인도·이란·서아시아 등 주변지역의 문화를 섭취하면서 독자적인 불교미술을 탄생시켰다. 이 지방의 4~5세기경의 석굴 중에 동대입불(東大立佛)이 서 있는 석굴 천장에는 태양신을 그린 것이 보인다. 이는 불교가 이란의 토속신인 미트라와 습합된 사례로서 바미안 회화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투르키스탄의 석굴사원은 기원후의 불교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특히 인도 아잔타 석굴의 영향을 받으면서 개착되기 시작하여 큰 규모로 발전했다.
쿠처[庫車] 지구에 있는 석굴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키질 석굴이다. 쿠처에서 67km 떨어진 밍구택 산을 깎아 만든 이 석굴 가운데 현재 편호가 된 석굴만도 236개나 되는데 그 중 75개가량은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키질 벽화는 석굴의 형식과 위치, 벽화의 주제와 양식 등을 기초로 하여 3단계로 나누어진다. 제1단계(3세기말~4세기 중엽)에서는 주로 석가불, 교각좌(交脚坐)의 미륵보살의 도솔천설법도가 표현되고 있으며, 색채는 주로 차가운 남색이 지배적이다.
제2단계(4세기말~5세기 중엽)는 절정기로서 내용은 큰 차이가 없으나, 표현에서 세부묘사가 도식화되는 점과 채색에서 밝은 부분을 강조한 하이라이트 수법을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제3단계(6세기 중엽~8세기 중엽)에서는 천불(千佛)이 유행하는 주제상의 변화와 함께 연대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연주문(連珠文) 장식이 등장한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보면 키질 벽화는 초기에 소승유부(小乘有部) 사상을 반영하는 반면, 말기에 이르면 대승적(大乘的) 내용을 가미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불교주제 외에도 악무(樂舞) 장면과 민속적 요소가 등장하는 점을 키질 벽화의 특징으로 덧붙일 수 있다. 쿠처 지역의 석굴군 중에는 쿰투라 석굴이 있는데, 이것은 쿠처에서 서쪽으로 21㎞ 떨어진 무자르트 협곡에 위치해 있다. 석굴은 총 112개소로서 벽화의 주제나 양식도 기본적으로 키질 벽화의 유형을 따르고 있으나, 다만 후기로 가면 당(唐)의 영향으로 중국식 소재와 양식이 지배적이다.
중앙 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인후지역(咽喉地域)에 있는 둔황의 석굴사원은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이 석굴은 366년에 개착된 이래 1,000여 년 간 지속적으로 조영되어 오늘날 남아 있는 것만 해도 492개소나 된다. 그러나 현재의 초기 석굴은 이보다 조금 후인 북량(北凉:397~439)시대에 속한다. 둔황 벽화의 주제는 다른 석굴사원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중심이 되나, 여기에 한(漢) 문화 특유의 전통이 가미되어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대체로 이와 같은 주제내용은 7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① 존상화(尊像畵)로서 각종 여래의 형상과 여래 주위의 협시(脇侍)와 8부중(八部衆) 등을 말한다. ② 불교경전에 의한 설화도(說話圖)가 나타난다.
이것을 세분하면 불전도(佛傳圖), 본생(本生) 설화도, 인연(因緣) 설화도로 나뉜다. 석가모니의 생애를 묘사한 불전도는 초기에는 탁태(托胎)·출가유성(出家踰城) 등 단편적인 내용을 표현하다가 북주(北周)에 이르면 석굴 290호에서와 같이 불전 전체를 묘사하기에 이른다. ③ 전통적인 신화를 주제로 하는데, 여기에서 동왕공(東王公)·서왕모(西王母)·복희(伏羲)·여와(女媧)·사신(四神)·우인(羽人)·개명·방사(方士) 등 불교와 도가가 습합된 현상을 보인다.
④ 경변(經變) 중 특히 대승경전의 변상도는 수대(隋代)부터 시작된다. 당대의 경변은 20종에 달하는데, 법화경변·유마경변·아미타경변 등이 유행했다. ⑤ 불교사적화는 수대에 처음으로 출현했다. 이것은 불교의 역사, 감응설화, 고승의 고사 등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약 40종이나 된다. ⑥ 공양자상으로서 석굴 조성에 공덕을 베푼 시주의 초상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조상숭배사상과 결합된 것으로서 급속히 발전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각 민족의 초상이 표현되어 있어 중요한 역사자료가 되고 있다. ⑦ 장식의장은 천장·의복·보관·기물 등에 묘사된 장식과 문양 등을 말한다. 초기에는 연화·팔메트·운문·용무늬·봉황문이 유행했고 수대부터는 페르시아 문양을 흡수하여 연주문·페가소스·수렵문 등이 보이다가 당 이후에는 포도문·석류문·당초문 등의 식물문양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벽화의 주제를 통해 중앙 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지닌 사상과 미적 이상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다양한 외래의 영향에서도 초기 벽화에서처럼 둔황 양식이라 할 만한 독자적인 영역이 형성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역남도의 미란 지방에서 발굴된 벽화 단편들은 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불교주제의 내용을 헬레니즘적인 이란풍의 표현법을 바탕으로 묘사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이 벽화에 보이는 '티타'라는 화가의 명칭이 로마식 이름인 티투스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이 일군의 벽화가 서양문화의 영향 속에서 제작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벽화들의 중요성은 그것들이 동투르키스탄의 어느 벽화보다도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하여 이 벽화들이 아무다리야 강 북쪽의 파야스테페와 카라테페의 초기 불교벽화와 비슷한 연대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음을 볼 때, 미란의 미술문화의 특성을 새롭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동투르키스탄 석굴 가운데 마지막 시기에 속하는 곳은 베제클리크이다.
서역북도에 있는 투르판에서 48㎞ 떨어진 곳의 화염산(火焰山) 협곡에 자리잡은 베제클리크 석굴은 총 83개소이고, 그 중 40개소가 벽화를 남기고 있다. 이 석굴들은 국씨고창시대(麴氏高昌時代 : 500경~643)에 개창되었고 13세기까지 이어진다. 유존된 대부분의 벽화들은 9세기말 이후 타림 분지를 장악했던 위구르족에 의해 완성된 것들이다. 벽화의 주제는 불교적 내용인데 예외적인 것도 존재한다. 38호 석굴 벽화에는 나무 밑에 백의(白衣)를 입은 마니교 신도들이 보인다.
이는 위구르족이 고창으로 이주했던 직후만 해도 그들 대부분이 마니교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베제클리크 벽화의 불교주제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 서원화와 천불도가 주류를 이룬다. 그밖의 베제클리크 벽화의 명품으로는 위구르 공양자와 왕자·왕녀 상을 들 수 있다. 이 투르판 지방의 회화 가운데는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복희·여와·수하미인(樹下美人) 등을 주제로 한 두루마리 그림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그림은 기본 도상이 중국적인 것에 근거하면서도 중앙 아시아적인 자신의 지역성을 강력히 표출하는 그런 유형에 속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인물의 인상이 서양인도 중국인도 아닌 바로 서역인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세밀화는 서투르키스탄의 경우, 이란 사산조의 마니교 경전에 들어 있는 삽화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이 세밀화는 이슬람 세계에서도 유행하여 초기의 바그다드 유파는 12세기경에서부터 몽골 침략(1258) 사이에 생겨났다.
이 시대의 세밀화는 장식성이 없는 간결한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몽골 침입 이후에는 원대(元代) 화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몽골파가 성립되어, 윤곽선에 강약의 태세(太細)를 표현하는 필선과 부감(俯瞰) 구도가 나타나는 변화를 보인다. 중앙 아시아에서 세밀화의 전통은 서투르키스탄에만 머물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16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후기작품의 예로는 15~16세기에 헤라트·부하라 등지에서 알리셰르·나보이의 시집에 그린 세밀화를 들 수 있다. 한편 중국회화가 서투르키스탄 회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좀더 살펴본다면 사실상 원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중국이 아랍 군대에 대패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전쟁의 포로였던 두환(杜環)의 〈경행기 經行記〉에 의하면 중국화가들이 고대 이라크 왕국인 아바스의 수도 쿠파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또 이보다 후인 10세기초에는 부하라에 시집온 중국 공주를 수행했던 화가들이 현지에서 활약했던 사실이 기록에 남아 중국회화의 서양파급의 정황을 짐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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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중앙 아시아의 회화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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