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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전선
영국이 새로운 병력을 계속 보충하고 군수품 공급이 점점 늘어난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대규모로 공세를 벌여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15년 12월에 프랑스·영국·벨기에·이탈리아의 군부 지도자들은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조프르의 사령부에서 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1916년에 프랑스·영국·러시아·이탈리아가 동시에 총공격을 개시한다는 원칙을 채택했다. 그러나 독일의 군사 행동 때문에 이 계획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영국군의 공격만이 제대로 시행되었다.
1915~16년 겨울에 이르자 팔켄하인은 러시아를 무력한 존재로, 그리고 이탈리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프랑스에 대해 적극적인 군사 작전을 전개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프랑스가 무너지면 영국은 유럽 대륙에 효율적인 군사동맹국을 전혀 갖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육상 작전보다는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팔켄하인은 서부전선에서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전선을 돌파할 필요가 없고, 결정적인 공격 지점을 선택하여 프랑스군의 병력 손실을 노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베르됭과 그 주변에 집결된 요새들을 선택했다. 베르됭은 독일군의 주요수송로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전선의 돌출부로서 수비대의 행동 반경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 수뇌부는 독일의 작전 계획에 대한 경고를 무시했고, 1916년 2월 21일 개전 이래 최대의 독일군 포격이 베르됭 주변의 참호들을 초토화시켰다. 베르됭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중 가장 길고 가장 격렬하며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독일군의 진격은 6월말까지 계속되었지만, 연합군은 1916년 7월 1일에 마침내 솜 강 연안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색인:제1차 솜 강 전투).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솜 강 북쪽에 펼쳐진 34km의 전선에서 정면공격을 시작했을 때, 독일군은 안전하게 참호를 파고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주일 동안 포격을 퍼부은 뒤 영국군 보병대는 '참호를 빠져나와' 과감한 공격을 전개했지만, 사실상 난공불락인 독일군 진지를 공격하다가 차례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영국군은 공격 첫날 6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9월에 영국은 새로운 무기인 탱크를 처음으로 전쟁에 도입했지만, 이 탱크는 전투에서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솜 강 공격은 차츰 소모전으로 변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베르됭에 대한 독일군의 압력을 줄이는 데 성공했고, 덕분에 프랑스군은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12월 중순까지 프랑스군은 포르두오몽과 포르보를 탈환했다.
유틀란트 전투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함대와 독일 함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 중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1916년 여름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 앞바다인 북해 어귀의 스카게라크 해역에서 벌어졌다.
영국 해군 정보국은 독일의 리하르트 셰어 제독이 5월 31일에 '대양함대'를 이끌고 출항했다는 사실을 영국 해군 제독 존 러슈워스 젤리코와 데이비드 비티에게 알렸다.
전투 순양함들로 구성된 정찰함대를 이끌던 비티는 프란츠 폰 히퍼 제독 휘하의 독일 정찰함대를 발견하고 추격했다. 독일 정찰함대는 주력 함대 쪽으로 달아났다. 오후 4시경 양쪽은 포격을 개시했다. 영국군은 심한 손실을 입고 주력 함대 쪽으로 후퇴했다. 독일 함대가 그 뒤를 추격했다. 오후 6시경, 양쪽의 주력 함대가 마주쳤다. 다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질녘에는 영국군이 유리해졌고, 셰어는 곧 젤리코와 마찬가지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독일 함대가 본국으로 가려고 다시금 뱃머리를 돌렸을 때, 영국 함대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양쪽 함대가 서로 엇갈려 지나갈 때 충돌이 일어나 더 많은 배가 침몰했다. 양쪽은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독일이 승리를 주장한 것은 이 전투에서 영국의 손실이 더 컸기 때문이고, 영국이 승리를 주장한 이유는 북해의 제해권을 계속 장악했기 때문이다.
동부전선
1916년 7월 러시아군은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은 사실상 제정 러시아 최후의 군사 작전이 되었다. 이 작전을 지휘한 A. A. 브루실로프의 이름을 따서 브루실로프 작전이라고 불린 이 공격은, 초기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어떤 저항에도 끄떡없이 '증기 롤러'처럼 밀고 나아가는 러시아의 뚝심에 대한 연합국의 환상이 되살아났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공격은 러시아 제의 죽음을 알리는 종을 울린 것이었다. 6월 4일에 브루실로프는 우선 타르노폴과 체르노비츠 지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허를 찌르는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체르노비츠를 점령했다.
그러나 전선의 다른 지역에 있는 무능한 지휘관들과 러시아 군부 내부의 빈약한 연락망 때문에 러시아군은 계속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9월초에 이르자 여름에 거둔 승리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도 사라졌다. 브루실로프는 러시아군 병력 가운데 100만 명을 잃었다. 이 손실 때문에 러시아군의 사기와 전력이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브루실로프의 공격은 간접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우선 이 공격 때문에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최소한 7개 사단을 빼낼 수밖에 없었고, 그결과 베르됭 전투와 솜 강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둘째, 이 공격은 루마니아의 불행한 참전을 촉진했다. 루마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 일부를 떼어 주겠다는 연합국의 유혹에 넘어가 1916년 8월 27일에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했다. 또한 루마니아는 동맹국이 다른 전선에 몰두하느라 루마니아의 공격에 재빨리 대응하지 못하리라고 믿었다. 동맹국은 8월말에 루마니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트란실바니아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12월 6일에 부쿠레슈티를 함락했다.
강화교섭 노력과 미국의 정책
1916년에 이르자 평화가 찾아올 가장 큰 가능성은 오직 강대국의 두 지도자(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독일 총리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태도에만 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1916년 12월 8일, 윌슨은 교전중인 양대 진영에 대해 '전쟁의 목적'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어서 1917년 1월 22일 윌슨은 국제화해와 '승리 없는 평화'를 호소했다. 영국은 윌슨의 중재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은밀히 밝혔다.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역시 평화 제의에 귀가 솔깃했겠지만, 독일은 이미 잠수함 전투에 너무 깊이 말려들어가 있었다.
독일의 전략과 잠수함 전쟁
독일의 해군 전략은 군사 목적과 민간 목적으로 나뉘어 있었다.
셰어 제독과 팔켄하인 장군은 작전을 제한하는 한 잠수함 전투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강화 교섭에 기대를 걸고 있던 베트만을 비롯한 정치가들은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무제한 잠수함 전투를 연기할 수 있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군사적 승리에 집착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의 봉쇄 때문에 독일은 군사적 승리를 얻기 전에 굶주림으로 무너져버릴 위기에 놓여 있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곧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1917년 2월 1일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전투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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