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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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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유럽 국가 대부분과 러시아, 미국, 중동 및 그밖의 지역에 있는 나라들이 대거 참여한 국제적인 전쟁(1914~18)의 종전 후 결과.

제1차 세계대전

ⓒ Hohum/wikipedia | Public Domain

오스만 제국

팔레스타인에서 오스만 투르크와 대치해 있던 앨런비는 책략과 견제로 투르크를 유인하여 서부전선에 배치한 병력을 줄이게 한 다음, 1918년 9월 19일에 투르크군보다 10배나 많은 병력으로 서부전선을 강타했다. 이 메기도 전투에서 영국군 보병대는 혼비백산한 수비대를 옆으로 밀쳐내고 기병대가 나아갈 길을 열어주었다. 이튿날에는 아풀라와 베이산 및 나자렛이 영국군의 손에 들어왔다. 이 작전은 알레포와 바그다드 철도 접속점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났다. 투르크 동부가 무방비상태인 것을 알고 있는 오스만 정부는 불가리아가 무너진 뒤 이제 연합군이 서쪽에서 수도 이스탄불을 향해 진격해올 것을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10월 30일 무드로스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 협정에 따르면 투르크는 연합군에 해협을 개방하고 군대를 해산하며, 연합군이 요구하는 전략 지점은 어디든 점령할 수 있도록 허락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투르크의 모든 항구와 철도를 이용할 권리를 주고, 아라비아와 시리아 및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나머지 수비대에 항복을 명령하도록 되어 있었다. 수세기 동안 내려온 오스만 제국은 이리하여 막을 내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개전 초기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 군주국은 이중성을 뚜렷이 드러냈다. 오스트리아 의회는 1914년 3월에 활동이 정지되어 그후 3년 동안 한 번도 소집되지 않은 반면, 부다페스트에 있는 헝가리 의회는 전쟁중에도 회의를 계속하여 군부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8년에 마침내 해체되었다. 10월 24일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분리·독립과 평화를 제창하는 헝가리 국민의회가 부다페스트에서 창설되었다. 10월 28일에 체코슬로바키아 위원회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공인'했고, 이와 비슷한 폴란드 위원회는 갈리치아와 슐레지엔 지방을 통일된 폴란드로 통합했다. 10월 29일 자그레브의 크로아티아인들은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및 세르비아인으로 이루어진 국가수립을 요구했다. 10월 30일 오스트리아 의회 의원들은 빈에서 게르만족의 독립국가 오스트리아의 수립을 선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연합국에 휴전 협정을 간청했고, 양측의 휴전 협정은 1918년 11월 3일에 빌라주스티에서 조인되어 11월 4일부터 발효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914년 8월 이후에 점령한 모든 영토만이 아니라 티롤 남부와 타르비시오, 이손초 계곡, 고리치아,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카르니올라 서부 및 달마치야에서도 철수할 것을 요구받았다. 모든 독일군은 15일 이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에서 추방되거나 억류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또한 연합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국내의 모든 수송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전함을 대부분 소유하게 되었다.

대(對) 독일 전쟁의 종결

미국의 대통령 윌슨의 평화 캠페인은 독일 국민의 전의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독일 정부가 1918년 10월에 강화 교섭을 자청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독일인들은 오로지 윌슨하고만 예비 강화 교섭을 가졌다. 그결과 맺어진 1918년 11월 11일의 최종적인 휴전협정은 형식에서 윌슨의 유명한 '14개 조항'과 그밖의 선언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공해에서의 자유항해권과 전쟁 배상금에 관해 영국과 프랑스가 제시한 조건이 딸려 있었다.

1917년부터 독일 총리였던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은 불가리아가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고 영국이 서부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편 날인 1918년 9월 29일에 사임했다.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는 당장 강화 교섭을 시작해도 좋다는 황제의 동의를 얻어냈다. 10월 3일 온건하고 정직하기로 유명한 바덴의 막시밀리안 공이 독일의 신임 총리가 되었다. 그날 밤 독일은 '14개 조항'에 바탕을 둔 휴전협정과 강화 교섭을 요청하는 각서를 윌슨에게 보냈다. 미국은 10월 8일에 회답을 보내어 독일이 우선, ① 윌슨의 원칙을 실행하는 협상을 수락할 것, ② 연합국 영토에서 독일군을 철수시키는 것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10월 20일에 독일은 다시 각서를 보내어, 윌슨이 독일의 자존심을 결코 모욕하지 않으리라 믿고 휴전협정과 군대 철수의 조건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에 동의했다. 윌슨은 연합국에 기꺼이 휴전협정을 제의하겠다고 밝혔지만, 그 조건은 독일이 다시는 전쟁 행위를 되풀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연합국은 2가지 조건을 붙여 휴전협정에 동의했다. 그 2가지 조건이란, 연합국은 윌슨의 '14개 조항' 가운데 2번째 조항(공해에서의 자유항해권)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민간인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손해 배상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나라 전체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발단은 10월 29일에 킬에서 수병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 소요 사태는 날로 확대되어 11월 4일에는 혁명으로 발전했다. 11월 7~8일 밤, '바이에른 민주사회주의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에 있던 막시밀리안 공은 빌헬름 2세의 황제 칭호와 프로이센 왕의 칭호를 박탈당했다. 이리하여 호엔촐레른 군주국은 종말을 맞았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막시밀리안 공의 뒤를 이어 독일 총리가 되었다.

휴전협정

독일은 벨기에와 프랑스, 알자스로렌 지방 및 라인 강 서쪽 연안 전역에서 철수할 것과, 네덜란드와 스위스 사이에 있는 라인 강 우안을 중립화할 것을 요구받았다. 동아프리카의 독일군은 항복해야 했고, 동유럽의 독일군은 전쟁 이전의 위치로 후퇴해야 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부쿠레슈티 조약은 무효화해야 했다. 독일은 모든 전쟁 포로를 본국으로 송환하고,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연합국에 인도해야 했다. 한편 연합국은 독일에 대한 봉쇄를 계속할 작정이었다. 독일측 대표단은 붕괴 직전의 독일에서 볼셰비즘의 위협이 심각하다고 호소하여, 이런 조항을 어느 정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연합국은 봉쇄를 늦출 수도 있다고 암시했고, 인도해야 할 전쟁 물자를 줄여주었으며, 동유럽의 독일군은 당분간 현지에 주둔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후방에서 혁명의 위협이 심각한데다 설상가상으로 서부전선에 포진해 있는 연합군의 공격이 임박하지 않았다면, 독일은 보다 많은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좀더 버텼을지도 모른다. 연합군은 11월 14일에 마지막 공세를 펼칠 계획이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휴전협상에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었을지 여부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 공세 전인 11월 11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드디어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군인이라기보다 민간 정치가인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독일측 대표단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배반행위'의 소문을 낳게 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독일군은 '전쟁터에서 결코 패배하지 않았는데' 민간인에게 배신당했다. 즉 전쟁에 싫증이 나고 패배주의에 젖은 민간인과 그 지도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군대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다는 것이 이 소문의 요점이다. 이는 독일 역사에 기록될 만큼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독일의 우익정치 선동가들은 전쟁의 막바지 단계에 연합국이 독일 국내에서 벌인 선전 때문에 민간인의 사기가 떨어졌다는 주장과 함께 이 소문을 퍼뜨렸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런 정치 선동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주장하기를, 독일이 군국주의와 팽창주의 정책을 채택하면 전쟁에서 당한 패배를 만회하고 적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유럽을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참전국들이 낸 사상자수는, 그 이전의 전쟁에서 나온 사상자수와 비교할 때 엄청나게 많은 것이었다. 연합국은 500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2,2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동맹국은 330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1,5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쟁 때문에 죽은 민간인 사망자수는 군인 전사자보다 더 많아서 약 1,3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민간인은 굶주림이나 헐벗음, 질병, 또는 대량 학살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국가 총동원병력 사망자 부상자 포로 및 행방불명 총병력손실 병력손실율
연합국
그리스 230,000 5,000 21,000 1,000 27,000 11.7
러시아 12,000,000 1,700,000 4,950,000 2,500,000 9,150,000 76.3
루마니아 750,000 335,706 120,000 80,000 535,706 71.4
몬테네그로 50,000 3,000 10,000 7,000 20,000 40.0
미국 4,355,000 116,516 204,002 4,500 323,018 8.1
벨기에 267,000 13,716 44,686 34,659 93,061 34.9
세르비아 707,343 45,000 133,148 152,958 331,106 46.8
영국 8,904,467 908,371 2,090,212 191,652 3,190,235 35.8
이탈리아 5,615,000 650,000 947,000 600,000 2,197,000 39.1
일본 800,000 300 907 3 1,210 0.2
포르투갈 100,000 7,222 13,751 12,318 33,291 33.3
프랑스 8,410,000 1,357,800 4,266,000 537,000 6,160,800 73.3
소계 42,188,810 5,142,631 12,800,706 4,121,090 22,064,427 52.3
동맹국
독일 11,000,000 1,733,700 4,216,058 1,152,800 7,142,558 64.9
불가리아 1,200,000 87,500 152,390 27,029 266,919 22.2
오스트리아- 헝가리 7,800,000 1,200,000 3,620,000 2,200,000 7,020,000 90.0
투르크 2,850,000 325,000 400,000 250,000 975,000 34.2
소계 22,850,000 3,386,200 8,388,488 3,629,829 15,404,477 67.4
총계 65,038,810 8,528,831 21,189,154 7,750,919 37,468,904 57.5
제1차 세계대전의 동원병력과 병력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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