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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우주발사체 계획

다른 표기 언어 有人宇宙發射體計劃

보스토크 계획과 머큐리 계획

미국과 소련은 우주계획의 주요 목표인 유인비행을 수행했다.

1961년 4월 소련은 Y. A. 가가린을 보스토크 1호에 탑승시켜 지구 주회궤도로 발사했다. 미국은 유인우주선으로서 최초로 머큐리 우주선을 발사했다. 보스토크와 머큐리 비행으로 인간이 무중력 상태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우주선이 우주공간에서 기동성을 갖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60년 제미니 계획은 표적 비행체와 랑데부 및 도킹 기술(아폴로 달착륙 계획에 필수적이었던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소유스

1967년 4월 소련은 지금도 비행하고 있는 가장 크고 복잡한 우주선인 소유스 1호를 발사했다.

이 우주선의 우주비행사인 V. M. 코마로프는 낙하산 회수장치의 고장으로 죽었다. 소유스 3~8호는 랑데부 및 도킹에 관련된 우주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1970년 6월 소유스 9호는 18일의 유인우주비행 기록을 세웠다. 이 우주비행사들이 지구로 귀환한 뒤 근육조정능력과 정상적인 수면습관을 회복하는 데 2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보고된 바 있다. 1971년 4월 소유스 10호는 우주정거장인 살류트와 랑데부하기 위해 3명의 우주비행사를 태우고 발사되었다.

발사된 지 27시간 후에 이들 우주비행사들은 길이 14m의 살류트 우주실험실로 건너갔다. 성공적인 비행은 이것이 재진입하는 동안 출입구 밀폐장치의 사소한 고장으로 인해 우주선 내의 공기가 빠져나가 3명의 우주비행사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그후 소련의 우주정거장 계획이 다시 재기되는 데 3년이 걸렸다. 살류트 3호(1974)로 소련은 장기간 거주계획을 시작했다. 곧이어 독자적인 임무를 갖는 소유스 계획과 살류트 계열 우주선의 지원을 위한 우주정거장 계획 등의 서로 다른 2개의 계획이 등장했다.

더 개량된 살류트 6·7호를 이용하여 소련은 승무원들이 우주정거장을 타고 생활·연구할 수 있는 기간을 점차 증가시켜 결국 그 기간이 211일이 되었다.

1986년 2월 소련은 영구 유인 궤도설비의 모체로 사용하기 위해 설계된 새로운 우주정거장을 설계했다. 미르(Mir)로 알려진 이 우주정거장은 대부분이 자동화되었으며, 화물수송·유인우주선·생활공간·연구설비 등으로 사용될 수 있는 확장 모듈용으로 6개의 도킹 개구가 설치되어 있다.

모듈에는 6명까지의 승무원들이 탑승할 수 있고, 많은 우주비행사 승무원들이 미르에 탑승하여 오랫동안 우주비행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1991년 소련 중앙정부가 붕괴된 뒤, 여러 공화국들이 자신의 영토 안에 위치한 우주설비에 대한 소유를 주장하여 소련의 우주계획에 대한 예산문제가 심각해졌다. 우주비행사인 S. 크리발레프는 6개월의 우주비행을 위해 1991년 5월 미르 우주정거장을 떠났다. 발사장이 위치한 공화국이 자국 출신의 우주비행사를 미르 우주정거장으로 발사할 것을 요구함에 따라 러시아인의 후임자와 교대될 수밖에 없었다.

미르에 탑승한 채 교대자를 313일 동안 기다렸던 크리발레프는 소련의 우주계획에 대한 불확실한 미래의 상징이 되었다.

아폴로 계획

아폴로 계획

아폴로 계획(사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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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J.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1960년대가 다 가기 전에 유인우주선을 달에 착륙시키겠다"고 했다.

이 계획에 붙여진 이름이 아폴로였다.

1967년 2월 지구궤도로 발사되는 최초의 유인 아폴로 계획은 1967년 1월 카운트다운 도중 우주선 선실 내부에 화재가 발생하여 농축산소 주변으로 번져 3명의 우주비행사가 죽는 사고가 일어나 연기되었다. 1967년 11월 무인 아폴로 우주선이 궤도로 발사되었다. 2번 이상의 무인 아폴로 비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후, 1968년 10월 11일 3명의 우주비행사가 탑승한 아폴로 7호가 달착륙선이 착륙하고 있는 동안 달 주위를 돌고 있는 사령선을 실험했다.

1968년 12월 21일 발사된 아폴로 8호는 달 주회궤도에 진입한 뒤 10회 선회했으며, 그뒤 지구로 안전하게 귀환했다. 이 우주비행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1969년 3월 3일 발사된 아폴로 9호는 10일 동안 비행하면서 지구 주회궤도에서 달착륙선의 작동을 시험했다. 5월 18일에 발사된 아폴로 10호는 아폴로 8호와 마찬가지로 달 주회궤도를 선회하면서, 2명의 우주비행사가 달착륙선으로 달 표면에서 1만 4,300m 높이까지 내려가 선회했다.

1969년 7월 16일 N. A. 암스트롱, E. 올드린 2세, M. 콜린스가 탑승한 아폴로 11호가 발사되어 아폴로 10호와 마찬가지로 달 주회궤도에 진입했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착륙선으로 옮겨 타고, 7월 20일 그리니치 평균시(GMT)로 오후 8시 17분에 달에 도착했다. 암스트롱은 오전 2시 56분에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이것은 인간에게 작은 발자국이지만, 인류에게는 하나의 큰 도약이다"라고 말했다. 올드린도 암스트롱과 함께 사진을 찍고, 약 21.7㎏의 달 토양(2가지 코어 표본을 포함)을 채취하고, 측정용 막을 치고, 지진계와 레이저빔 반사용 장비를 설치하고, 성조기를 꽂고, 태양풍 실험장비를 설치하는 데 약 2시간을 보냈다. 이 모든 행동이 달착륙선으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지구의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다.

아폴로 12~17호가 그뒤 4년에 걸쳐 발사되었다.

하나를 제외한 모든 우주선이 달 표면 탐사, 표본채취, 실험장비 설치 등의 달 우주비행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며, 모든 우주선의 승무원들이 무사히 귀환했다.

스카이랩과 아폴로-소유스 시험계획(Apollo-Soyuz Test Project/ASTP)

미국 최초의 우주정거장인 스카이랩은 1973년 5월 14일 발사되었다.

1973년 5~11월 각각 3명의 우주비행사로 구성된 3개의 팀이 교대로 스카이랩에 탑승하여 171일 13시간을 생활하며 연구했다. 이 우주비행은 우주환경과 장기간의 우주생활에 대한 생물학적 관계를 이해하는 데 공헌했다. ASTP는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수행한 유일한 유인 우주비행이었다.

1975년 7월 15일 각각 다른 발사장에서 발사된 아폴로 우주선과 소유스 19호 우주선은 2일 후 미국이 만든 도킹 모듈(docking module)로 궤도에서 랑데부·도킹했다. 이 두 우주선이 서로 연결된 2일 동안 두 국가의 우주비행사들은 공동으로 지구관찰을 비롯해 천문·의학·기술에 대한 실험을 했다.

우주수송 시스템(Space Transportation System/ STS)

미국의 우주계획은 1981년 4월 12일 재사용을 위해 설계된 유인우주선인 우주왕복선을 처음으로 발사하여 새로운 우주시대를 열었다.

우주왕복선은 날개가 달린 궤도선, 낙하 탱크, 2개의 고체추진제 로켓으로 이루어져 있다. 궤도선은 화물과 승무원을 수송하며, 3개의 주기관뿐만 아니라 사실상 모든 컴퓨터 및 전자식 하드웨어를 포함하고 있다.

발사시 왕복선의 고체추진제 부스터와 액체추진제 로켓 기관은 함께 점화되어 이륙 후 약 2분 동안 추력을 발생시킨 뒤 로켓 부스터는 분리되어 재사용을 위해 낙하산으로 해양에 떨어진다. 이 고체추진제 로켓 부스터는 20회를 사용할 수 있다. 주기관은 계속해서 6분 30초 동안 연소되어 이 왕복선에 궤도속도의 99%를 제공해 준다.

이 시점에서 외부 탱크는 분리·낙하하여 지구대기에 진입하면서 분해되며 2개의 가동기관이 이 왕복선을 궤도로 올린다. 재진입시에는 이 기관들이 역추진 로켓으로 재점화된다. 고급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타일은 왕복선이 대기를 제동장치로 사용함에 따라 알루미늄 선체에 발생하는 높은 마찰열로부터 선체를 보호한다. 왕복선이 느려지고 대기의 밀도가 커짐에 따라 날개에 양력이 발생하여 이 비행체는 초음속 글라이더가 된다.

우주왕복선 계획에 참여하기 위한 노력으로 ESA는 모든 우주과학 분야의 실험을 하기 위해 몇 가지 형태로 조립할 수 있는 스페이스랩(Spacelab)의 제작을 제안했다.

궤도선의 화물칸에 실려 운반되는 우주실험실은 우주공간에서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장소와 설비를 제공하는 일종의 우주정거장으로 사용된다.

예산 감축과 더불어 왕복선의 주기관을 개발할 때와 최초의 궤도선인 컬럼비아호에 내화 타일을 붙일 때의 문제로 인해 초기 발사가 3년 뒤로 연기되었다. 처음 4차례의 임무는 비행개발을 위한 것으로 2명의 우주비행사가 타고 있었다.

첫 비행의 화물은 개량된 계기장비로 이루어졌으며, 2~4번째 비행은 왕복선이 지구관측과 우주과학 및 군사실험에 적합한지를 입증하기 위해 설계된 화물을 운송했다.

1982년 11월 5번째 우주비행에서 왕복선은 2개의 통신위성을 발사하는 최초의 상업적 활동에 이용되었다. 왕복선은 우주공간에서 과학실험을 하는 것 이외에도 고장난 인공위성을 회수·수리하는 데도 사용되고 있다.

왕복선 계획은 1986년 1월 28일 챌린저호가 이륙한 후 73초 만에 폭발하여 7명의 승무원 전원이 죽는 큰 실패를 겪었다.

승무원 중에는 최초의 민간인(고등학교 교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스터 로켓의 접합이 불안전하여 발생한 것으로 판명난 이 사고는 25번째 왕복선 우주비행에서 발생했는데, 설계상의 문제를 수정하기 위해 비행이 보류되었다. 왕복선 비행은 나머지 3대의 궤도선인 디스커버리호·콜럼버스호·아틀란티스호에 새로운 안전장치를 설치한 1988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4번째이자 마지막 왕복선인 엔데버호는 1991년에 만들어졌다. 엔데버호는 1992년 챌린저호 발사 실패 후 처음으로 발사에 성공했다. 챌린저호의 대체 기종인 엔데버호의 첫 비행 목적은 궤도를 이탈한 통신위성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이후로도 엔데버호는 몇 차례 우주로 쏘아 올려져 각종 실험과 우주정거장 건설에 이용되었다.

우주왕복선 계획은 챌린저호 사고 이전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발사 횟수는 원래 계획에 미달되었고 비행비용은 예상한 것보다 더욱 많아졌다. 그러나 왕복선은 기존의 우주선으로 할 수 없는 임무를 가능하게 했으므로 그 중요성이 계속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임무로는 영구 유인 우주정거장의 조립과 보급이 있다. NASA는 1960년대 이후 이러한 우주정거장 계획의 가능성을 연구했지만, 다른 계획이나 예산상의 문제로 인해 항상 보류되었다. 그러나 1984년 미국 정부는 NASA가 1990년대 우주정거장을 개발하도록 위임했다.

'프리덤'(Freedom)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우주정거장 계획은 설계와 예산 문제로 어렵게 되었다. 그후 NASA의 제안으로 미국ㆍ러시아ㆍ일본ㆍESA 등 16개국이 참여하는 국제우주정거장 건설계획이 세워져 1998년부터 우주정거장 건설에 필요한 자재를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선에 실어 쏘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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