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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Alexios I Komne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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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048,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망 1118. 8. 15
국적 비잔티움

요약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의 비잔티움 황제(1081~1118 재위).

알렉시오스 1세(Alexius I Comnenus)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의 비잔틴 황제(1081~1118 재위).

ⓒ TRAJAN 117 / wikipedia | Public Domain

콤니노스 왕조를 건립하고 11세기에 노르만족과 투르크족에게 패배해 약해졌던 제국의 세력을 부분적으로 회복했다.

요안니스 콤니노스의 셋째 아들이자 이사키오스 1세(1057~59 재위)의 조카로, 유력한 비잔티움 지주가문 출신이며 특히 동부와 중부 아나톨리아의 비잔티움 영토를 침략해들어오는 투르크족을 막기 위해 더욱 효과적인 방어조치를 취할 것을 오랫동안 주장해온 군벌 실력자의 한 사람이었다. 1068~81년에 로마누스 4세와 미카일 7세, 니키포로스 3세의 짧은 치세 동안 유능한 군사활동을 벌였다.

그러고 나서 자기 형제 이사키오스와 어머니 안나 달라세나, 부인 이레네의 친정 가문인 막강한 두카스 가문의 지원을 얻어 니키포로스 3세에게서 비잔티움 제위를 탈취했다.

알렉시오스는 1081년 4월 4일 제위에 올랐다.

50여년에 걸친 무능하거나 단명한 통치자들의 시대 이후에 그는, 그 딸이자 전기작가인 안나 콤니노스의 말대로,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제국을 인수해 탁월한 군사적 능력과 외교적 재능으로 상황을 호전시켜 놓았다. 그는 로베르토 기스카르가 이끄는 남부 이탈리아 노르만족이 그리스 서부를 침략했을 때(1081~82) 이들을 물리쳤다. 이 승리는 베네치아 해군의 도움으로 얻어졌으며 그 대가로 베네치아에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의 광범위한 무역특권을 허용했다.

1091년에 그는 끊임없이 도나우 강을 넘어 발칸 반도로 출몰해온 투르크 유목민 페체네그족을 격파함으로써 당시 이미 중부 아나톨리아에 룸(코냐) 술탄국을 건설한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을 저지했다. 그는 코냐의 술라이만 이븐 쿠탈미시와 협정을 맺었으며(1081) 뒤이어 그 아들 킬리치 아르슬란(1093), 그리고 비잔티움 동부 접경의 다른 이슬람 군주들과도 협정을 맺었다.

국내에서 알렉시오스는 중앙권력을 강화하고 직업군인을 양성해 육군과 해군을 튼튼하게 구축하는 정책을 취해 서부와 남부 아나톨리아 및 동부 지중해 해상에서 비잔티움의 세력을 확대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제국의 통일성을 위협해온 대지주 토호계급의 막대한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능력이나 의사가 없었다. 오히려 더 많은 양보로 그들의 입지를 강화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군역 및 다른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특정지역에 대한 재정운영권을 허용해야만 했다. 그의 후계자들 세대로 내려갈수록 더욱 강해진 이런 보상 방식은 불가피하게 중앙의 세입과 제국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그는 이교를 억압했으며 동방정교회를 보호하는 제국의 전통적인 역할을 고수했으나 재정이 부족할 때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으며 뒤이어 교회로부터 그 책임을 추궁당했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알렉시오스는 중요한 고비에 제국을 하나로 결속해 1204년까지, 부분적으로는 1453년까지 제국이 존속할 수 있도록 만든 공로자로 부각되었으나 현대의 학자들은 그의 후계자들인 요안니스 2세(1118~43 재위) 및 마누엘 1세(1143~80 재위)와 더불어 단지 임시변통의 미봉책을 취했을 뿐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알렉시오스에 대한 판단은 비잔티움 제국의 누대에 걸친 내부적 약점과 나아가서 1097년 이래 서유럽 십자군들이 초래한 일련의 위기 때문에 상당히 제약을 받고 있었던 점을 감안해야 한다.

제1차 십자군(First Crusade)

제1차 십자군 원정 동안 유럽의 지도(1097)

ⓒ Hohum / wikipedia | Public Domain

예루살렘 성지를 되찾으려는 열망과 아울러 새로운 영토에 대한 희망이 동기가 된 십자군 운동은 갈수록 비잔티움의 영향권을 잠식해 들어왔으며 아나톨리아에 제국의 권위를 다시 확립하는 데 기본을 둔 알렉시오스의 외교정책을 좌절시켰다. 이슬람 권력자들과의 친선관계가 우연한 일로 파탄을 겪고 안티오키아 같은 귀중한 비잔티움 영토가 오만한 서방의 소제후들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알렉시오스는 목격해야 했다. 그들은 심지어 로마 가톨릭교를 그리스 정교회 대신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알렉시오스의 치세중에 서방의 가톨릭교와 동방의 그리스 정교회 사이에 최후의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서부 아나톨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일부 회복했고 또한 남동부 타우루스 지방으로 진출해 아다나와 타르수스 주변의 비옥한 해안평야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아울러 시리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멀리 진격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뿐만 아니라 뒤이은 콤니노스 가문의 황제들은 어느 누구도 라틴 십자군이 세운 공국들에 대해 영구적인 통제권을 확립할 수 없었다. 또한 비잔티움 제국은 1107~08년 알렉시오스가 서부 그리스의 아블로나를 침공한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했을 때와는 달리 서부의 섬과 속주에 대한 노르만족의 뒤이은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라틴인, 특히 노르만족의 연이은 공격과 이슬람 공국들의 끊임없는 침입, 헝가리와 발칸 공국들의 세력 성장 등 모든 여건이 불리하게 작용해 비잔티움 제국은 사방이 잠재적인 적대세력들에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었다. 외견상의 성과는 있었지만 알렉시오스의 뛰어난 외교술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지속적으로 붕괴했으며 끝내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는 결과를 모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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