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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포로스 3세

다른 표기 언어 Nikephoros III Botaneiates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미상
국적 비잔틴

요약 11세기말 활동한 비잔티움의 황제(1078~81 재위).

니키포로스 3세(Nikephoros III Botaneiates)

ⓒ Eloquence/wikipedia | Public Domain

제위를 유지하기 위해 투르크족의 도움을 받아 셀주크 투르크의 아나톨리아 지배권이 강해졌다.

소아시아의 군인 귀족 집안 출신으로 막강한 포카스 가문과 친척이었으며, 아나톨리아 테마(행정구역)의 사령관직을 맡았다.

황제인 미카엘 7세 두카스에 대항하는 반란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났을 때 아나톨리아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황제로 선포되었다(1078. 1. 7). 아나톨리아의 셀주크인 지배자 술레이만과 자기 부하들의 지지를 받아 니케아(아나톨리아 북서부)에서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3개월 뒤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했고 미카엘 7세를 퇴위시켰던 귀족과 성직자들도 그의 계승권을 인정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알바니아 사령관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우스와, 그를 이어 알바니아 사령관이 된 니키포로스 바실라키우스가 제위 계승권을 주장했으나 이들을 물리쳤다.

부인이 죽은 뒤, 왕위에서 쫓겨났으나 아직 살아 있던 미카일 7세의 아내 마리아와 결혼하고 미카일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뒤에는 마음을 바꾸어 자기 조카를 후계자로 정하고 콘스탄티누스의 약혼녀를 수녀원으로 쫓아냈는데, 그녀는 노르만족인 로베르토 기스카르의 딸이었기 때문에 뒤에 기스카르가 비잔티움 제국에 쳐들어오는 구실이 되었다.

1080년 소아시아에서 또다른 제위 찬탈자 니키포로스 멜리세누스가 나타나 니키포로스가 했던 것처럼 투르크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그결과 양쪽이 각각 투르크에 원조를 요청하는 내분이 계속되어 결국 소아시아의 대부분은 비잔티움에서 떨어져 나가 이코니움(지금의 터키 코니아)을 중심으로 한 셀주크 술탄국 룸(Rum)에 합쳐졌다. 제국의 분열을 막지도, 제위를 지킬 수도 없었던 니키포로스는 1081년 4월 4일 퇴위해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페리블렙토스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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