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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몽 1세

다른 표기 언어 Bohemond I
요약 테이블
출생 1050/58(?)
사망 1111. 3. 7, 아풀리아 카노사
국적 안티오키아

요약 오트란토 공(1089~1111), 안티오키아 공(1098~1101, 1103~04).
별칭은 Boh대체이미지mond de Tarente. 본명은 Marc.

제1차 십자군 전쟁 때 안티오키아(지금의 안타키아)를 점령했다(1098. 6. 3).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의 첫 아내인 알베라다 사이에서 태어난 보에몽은 마르코라는 세례명을 받았지만 보에몽이라는 전설적인 거인의 이름을 딴 별명도 갖게 되었다.

그당시의 한 사람이 그를 보고 '멋진 구경거리'라고 말했을 만큼, 이상적인 키와 건장한 체격을 갖춘 기사였다. 그는 어린시절을 이탈리아 남부에서 보냈다. 노르만족 출신인 아버지 로베르는 용병대장으로 이곳에 와서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의 지위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보에몽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그가 태어난 날짜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1079년에 그는 아버지 군대의 한 부대를 맡아서 지휘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계모인 시젤가이타는 아버지의 상속자가 될 루지에로 보르사를 낳았다. 따라서 보에몽은 이복 동생 때문에 유산을 전혀 물려받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 제국이 약해진 상황 속에서 스스로 땅과 재산을 찾아야 하리라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1081년에 보에몽은 아버지의 군대를 지휘해 두라초 남쪽에 있는 아블로나 시를 점령했다.

그러나 같은 해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자가 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의 도전을 받았다(노르만족). 그로부터 30년이 넘도록 알렉시오스와 보에몽은 경쟁자 관계를 유지했다. 1081~85년에 벌어진 첫번째 전쟁에서, 보에몽과 그의 아버지는 서유럽의 그리스 제국을 거의 분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노르만군이 몇 차례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알렉시오스는 1083년 보에몽을 테살리아의 라리사에서 쫓아냈다. 1085년에 아버지가 죽었으나 보에몽은 한푼의 유산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과 맞서서 이길 가망도 거의 사라졌다. 그후 4년 동안 루지에로 보르사는 보에몽이 바리에 발판을 마련하도록 허용했고 이곳에서 그는 알렉시오스와 싸울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예루살렘의 성묘를 사라센으로부터 빼앗는 사람에게는 이승과 내세에서 충분한 보상을 주겠다고 제의하면서 1095년 11월에 제1차 십자군을 출범시키자, 마침내 보에몽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보에몽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동쪽을 향해 떠났다. 1096~97년 겨울에 보에몽과 그가 이끄는 소규모의 노르만군은 무사히 그리스 땅을 가로질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통과할 때 그는 알렉시오스 황제와 신중하지만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알렉시오스는 보에몽을 비롯한 대다수의 지휘관들에게서 충성 서약을 받아낸 뒤, 그들이 이슬람교도한테서 되찾는 땅을 비잔티움 황제에게 돌려준다면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그는 지휘관들의 출발을 재촉해 그들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후에 투르크와 싸우게 된 보에몽은 니케아·도릴레움·안티오키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는데, 특히 안티오키아에서는 포위 공격을 계속했다(1097. 10~1098. 6. 3)(셀주크). 십자군이 안티오키아 시를 함락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투르크의 한 반역자와 벌인 협상과 절묘한 작전 덕분이었다.

안티오키아를 함락한 뒤 투르크군에게 반대로 잠시 포위되어 있는 동안 보에몽은 방어 작전을 지휘했고, 투르크군이 물러가자 십자군은 여름과 가을을 빈둥거리며 보냈다.

1099년 1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남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을 때, 십자군 지휘관들이 알렉시오스에게 한 서약을 어기는 것이 두려워 보에몽의 영유권 주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안티오키아의 실질적인 소유자가 되었다. 보에몽은 예루살렘 점령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체면을 생각해 나중에 예루살렘의 성묘(Holy Sepulchre)로 갔다.

십자군 중 상당수가 고향으로 떠나자 보에몽은 북쪽의 알렉시오스와 동쪽의 이슬람 세계에 둘러싸인 그의 도시 안티오키아에 남겨졌다. 보에몽은 알레포를 공격한 뒤, 안티오키아 북쪽에 있는 세바스테아(시바스)의 토후를 공격했는데 이것이 실수였다. 그는 복병을 만나 사로잡혀 몇 달 동안 포로로 붙잡혀 있어야 했다. 1103년에 풀려난 그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1105년에는 바리로 가서 그리스군과 싸우기 위한 증원군을 모집했다.

1105년 9월에 그는 로마로 가 교황을 면담한 뒤 1106년초에 프랑스를 두루 여행했고, 1106년 봄 프랑스 왕 필리프 1세의 딸 콩스탕스와 샤르트르에서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렸다. 30년 전만 해도 땅도 없는 젊은이였던 보에몽은 이제 인생의 절정에 서 있었다. 1107년 9월에는 이미 십자군 전쟁을 시작할 준비가 끝나 있었고 그로부터 1개월도 채 못 되어 대규모 군대가 아블로나에 상륙했다.

그러나 알바니아에서 불운을 만났다. 그가 이런 막다른 궁지에 몰렸을 때, 전쟁을 끝내고 싶어한 알렉시오스는 보에몽이 충성을 서약한다면 그 대가로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넘겨주겠다고 제의했다. 보에몽은 심한 굴욕감을 느꼈지만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안티오키아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했다.

알렉시오스와의 불화가 해결된 뒤의 평화시대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콩스탕스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하나는 나중에 안티오키아의 군주가 되었다. 보에몽은 군대를 다시 일으키려고 애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1111년 그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그리스군과의 전투는 끝났고 그의 경쟁자인 알렉시오스도 그를 뒤따라 1118년에 세상을 떠났다. 거인의 이름을 별명으로 가졌던 보에몽은 거대한 적과 맞서 싸웠고 죽을 때에는 중요한 십자군 국가들 가운데 하나인 안티오키아 공국을 상속자들에게 물려주었다.

역사는 그를 미남이자 천재적인 전사,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외교관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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