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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아프리카 대륙의 역사.
일찍이 검은 아프리카에는 역사나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전해져왔으나 최근의 연구로는 아프리카에 여러 훌륭한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BC 8세기 후반에는 이미 크슈인(人)이 나일 강 중류의 멜로에에 피라미드 문명을 이루었고 BC 3세기말에서 2세기초에는 그들만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 멜로에 문명이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집트 문명이 지중해의 페니키아 그리스·로마 문명에 영향을 끼치고, 그와 같은 문명과 어우러진 형태로 북아프리카에 파급된 듯하다. 또한 이집트 문명은 홍해와 나일 강 연안에서는 페니키아·그리스·아랍·유대 등의 문명과 혼합되어 동아프리카에 영향을 주었다.
인도네시아와 페르시아 만, 아랍 등지의 뱃사람들이 모잠비크·마다가스카르 등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잔지바르 섬의 잔지(Zanji)는 아랍인이 동아프리카를 부르는 말로서, 잔지 왕과 페르시아 왕 사이에 교섭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BC 293년의 페르시아 문서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선사시대
인간의 화석기록
이제까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원인(原人)과 인류화석 유적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으나 수백만 년 동안 아프리카 대륙에 지속적으로 인류가 거주해왔다는 것을 알려주기에는 충분하다.
많은 유적지에서 석기들이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으며 몇몇 곳에서는 동물의 화석도 발견된다. 그러나 도구를 만들었던 사람의 유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칼륨-아르곤 연대측정 방식에 의해 160만 년 이상된 것으로 추정되는 탄자니아 지방 올두바이조지의 제2지층 상층부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과 후기 플라이오세(世) 사이에는 기록상 오랜 단절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우라늄-토륨 연대측정으로 약 13만 년 전의 것으로 잠정 추정되는 발견물들이 에티오피아 남부 오모 강 유역에서 나왔다. 이러한 사실은 호모 사피엔스로 알려진 존재가 아프리카에 초기부터 있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약 3만 5,000~5만 년 전까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이남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호모 사피엔스 로디지엔시스(카브웨인 또는 로디지아인)와 호모 사피엔스 이후에 나타난 니그로산족(族)의 조상이었을 것이다. 3만 년경 이후의 부시마노이드 유적이 많이 있다. 2만~10만 년 전의 인류의 유골들은 수단에서 희망봉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몇몇 고고학적 유물들로부터 플라이스토세(약 1만~160만 년 전)에 아프리카 서부에 인류가 거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홀로세(최근 1만 년간) 전의 인류 유골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인류의 생활방식
후기 플라이오세 동안 사냥과 채집을 해왔던 인류는 밀림지대를 피해 사바나와 초원 지대에서 옮겨다니며 살았다.
유적지대에서 발견된 동물뼈를 보면 아슐리안 공작(工作) 인류는 덩치 큰 동물들을 사냥하는 데 능숙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 시대의 인류가 껍질을 벗기거나 고기의 관절들을 잘라내기에 적합한 손도끼와 칼처럼 규모가 큰 절단용 도구들을 중점적으로 사용했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플라이오세 전기에서 후기로 옮겨가는 동안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지역의 기후는 비교적 건조했으나, 플라이오세 전기의 대부분은 아슐 문화기에 비해 습기가 많았고 온도도 낮았다.
사하라 이남지역은 플라이오세 후기가 끝난 후 커다란 기술변화가 있었다.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오던 큰 절단용구들이 사라져갔으며, 대신 매우 튼튼하게 만든 잘게 써는 도구들과 매우 다양한 종류의 작은 돌조각 연장들이 사용되었다. 동굴이나 바위와 같은 거주지는 아프리카의 특정지역에서만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수렵인들이 그들의 조상이나 오늘날 칼라하리 사막의 산족(부시먼)과 같은 방식으로 생활했음이 틀림없다.
화석과 현대 인류의 계통발생학적인 유사성
현재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지방의 토착민들은 흑인종, 코이산어족(호텐토트와 부시먼 등의 언어를 포함하는 아프리카 남부의 어족), 코카서스 인종(동부 햄족) 등의 3개 부류로 나뉜다.
이들은 피부색이나 머리카락 모양 등 외견상의 특징으로 쉽게 구분이 된다. 그러나 골격의 특징만을 놓고 볼 때 여러 형태로 큰 변화를 거쳤을 듯한 오늘날의 원주민에게도 먼 옛날의 조상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부분적인 화석유물로서는 이들 3개 부류를 정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흑인종은 전형적으로 좁은 두개골과 둥근 이마를 가지고 있는데, 동부 햄족 또한 두개골이 좁고 이마가 둥글다. 부시먼 역시 이마가 둥글다. 위턱이 앞으로 튀어나온 것이 흑인종의 특징이지만 화석인류에서는 얼굴의 이 부분이 언제나 뚜렷이 나타나 있지는 않다.
후기 플라이스토세에 북아프리카나 서부 아시아로부터 '아프리카의 불'지방(지금의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지방)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코카서스 인종은 그 이전에는 사하라 이남에 살고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 따라서 흑인종과 코이산어족 두 부류만이 논의의 대상이 된다. 코이산어족은 오늘날에 와서는 흑인종과 피부색 및 외형에서 뚜렷이 구분되지만, 혈통적으로 보면 이 두 종족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틀림없다.
한 종족이 선택에 의해서든 다른 종족에게 쫓겨서든 색다른 환경에 몸담게 되면 그 환경조건에 신체적으로 적응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작은 키는 단백질이 부족한 숲속에서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된다. 피그미족의 조상은 아마 훨씬 더 컸을 것이며, 칼라하리 사막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산족도 그들의 커다란 두개골로 보아 지금보다는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흑색종과 코이산어족은 하부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한 카브웨인은 플로리스뱃족이나 싱가족과 같은 형태의 종족을 탄생시키는 데 유전적인 기여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기 플라이스토세 전까지는 흑인종의 존재가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서부 및 중앙 아프리카의 삼림이 좀더 울창한 지역에서 살고 있는 현재의 스틸베이인들, 즉 루펨반을 흑인종으로 생각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고대에서 근대까지
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에서 유적이 발견되면서 아프리카 대륙에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살고 있었음을 암시해주고 있지만, 대륙의 역사는 북아프리카 이집트 문명의 점진적인 발전과정에서 시작된다.
마그리브 또는 바르바리 등으로 알려진 지금의 모로코·알제리·튀니지 등이 위치한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은 바다와 사막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어 매우 특징적인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역사가 형성되기 시작한 고대부터 베르베르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해왔는데, 바르바리라는 이름은 이 종족에서 유래된 것이다.
외부로부터 사람들이 이주해와 가장 먼저 정착이 이루어진 곳은 페니키아인들에 의한 튀니지였다. 이중에서 가장 유명한 정착지는 도시국가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동·서 통로를 장악했으며 또한 600년 이상 지중해 서부를 지배했다. BC 264~146년에 걸친 3번의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힘을 무력화시켰으며, 바르바리는 로마 제국으로 흡수되어 반달족이 침입할 때까지 그 지배하에 있었다. 게르만 혈통의 반달족은 AD 429년 스페인으로부터 바르바리로 칩입해왔다.
쇠락해가던 바르바리의 로마 정부는 반달족 앞에 무릎을 꿇었고 이들은 약 1세기 동안 그 지역을 통치했다. 이들과 로마화한 토착민들 사이의 알력은 규율이 잡혀 있는 정부체제를 붕괴시켰으며, 반달족 정부는 비잔틴 제국의 새로운 맹습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6세기경 로마 제국의 중심권력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53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된 비잔틴의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아프리카에 상륙해 반달족을 몰아내고 동부 바르바리에 로마 제국을 재건했다.
바르바리에 남아 있던 로마식 질서는 7세기 후반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사라졌다. 이들의 첫번째 원정은 이집트에서 출발해 몇 곳의 기지를 급습한 것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이슬람국의 설립은 670년경 우크바 이븐 나피에 의해 세워진 알카이라완(지금의 튀니지 카이루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랍인의 초기 침략의 열풍은 수적으로 미미했고, 종족의 생활이나 언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바르바리는 11세기 베두인의 침입을 받기 전까지는 베르베르인의 국가였다. 900년경까지 바르바리는 완전히 이슬람 정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19세기 유럽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상태를 유지했다. 현재의 알제리 지방은 19세기 프랑스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실제적으로는 중앙정부가 없는 상태였다. 바르바리에 처음으로 투르크족이 근거지를 확립한 시기는 약탈선 선장 아루즈가 알제리 지젤리에 자리를 잡은 1514년부터였다.
이같은 개인사업은 후에 이스탄불의 오스만 정부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으며, 알제리의 섭정체제가 탄생해 70년간 지속되었고, 그후 튀니지 섭정체제로 이어졌다.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를 점령했으며, 그 의도는 외형상으로는 해적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실은 샤를 10세가 국내에서 일어난 사건들로부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던 필요성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따라서 결말이 확연했던 알제리 정복은 오랜 시간을 끌면서 진행되었다. 이슬람교에 호소해 반대세력을 조직해냈던 아브델카데르의 용맹스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은 일반적으로 1847년에 완료된 것으로 추정된다. 튀니지와 모로코도 같은 운명의 위협을 받았다. 아프리카 전대륙에 대한 유럽인들의 분할 점령이 막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하라 사막과 수단
북아프리카인들은 수단에서 흑인과 접촉하게 되었다.
제4기 이래 사하라 지방이 말라버린 것은 신석기 대변혁을 촉진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일 강 유역에서 이같은 변혁이 진전됨으로써 이집트 왕조의 문명이 출현했던 것이다. BC 8세기 중엽 수단인의 쿠시 왕국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그곳에 제25왕조를 세울 만큼 막강한 힘이 있었는데, 제25왕조는 BC 7세기 아시리아인들에게 축출될 때까지 그곳을 통치했다. 그후 이집트풍에 물든 쿠시의 군주는 나일 강 유역 수단의 혼성 거주민들을 계속 통치했다.
메로에는 아프리카에서 철을 사용한 최초의 중심지였다. 5세기경 왕가라 지역 바로 북쪽의 사막과 경계를 이루던 사바나 지대에 가나 왕국이 출현했다. 이 왕국은 그 지역의 흑인 말링케(만딩고) 일족에 대한 우위권을 확립했다. 7세기 마그리브에 아랍인들이 들어올 무렵 가나는 이미 '황금의 땅'으로 이름을 떨쳤다. 황금을 비롯한 수단 서부지방의 산물들은 사막 무역로를 지배했던 베르베르 종족을 통해 가나의 시장으로 전해졌다.
낙타가 사막 횡단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베르베르 유목민들이 사막을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이동거리가 늘어나 흑인들이 경작하는 오아시스에 대해 덜 의존하게 되었으며, 또 수단 내의 흑인들의 경작지역은 남쪽으로 밀려났다.
5~13세기 사하라 지역과 수단의 역사를 보면 누비아를 제외한 그밖의 지역에서 종족들의 이동이 상당히 빈번했다. 누비아에서는 5세기경 여러 통치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쿠시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에 새로운 힘을 더했다.
그러나 이들 왕국은 이슬람 무역상들과 이집트로부터 베두인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점차로 쇠약해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4세기경에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수단의 역사 형성기에서 중부 및 서부 수단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외부적 흐름을 두 줄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마그리브로부터의 영향이며, 또 하나는 나일 강 유역 및 홍해로부터의 영향이다. 이 두 줄기가 하나로 만나 서로 합쳐진 곳이 바로 지금의 나이지리아 지역이다.
아프리카 서부에서 당시 주로 흑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가나 왕국은 산하자베르베르 종족과 충돌을 빚었다.
가나 왕국은 마침내 1076년경 알모라비데 왕조에게 정복당했는데, 알모라비데 왕조는 마그리브에 좀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딩고 종족의 순디아타는 가나를 붕괴시키고 좀더 강력하고 새로운 말링케인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것이 바로 말리 제국이다. 금, 소금, 콜라 열매, 노예 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말리와 통북투 및 가오는 크게 번성했다.
19세기에 와서는 외부인들이 아프리카의 무역과 영토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들은 세네갈 강 유역에 거점을 세웠으며, 영국인들은 황금해안과 나이지리아 지역의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나일 강 유역의 수단을 통제했으며, 이슬람교도들 역시 수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풀라니족이 흥기해 1804~10년에 국가를 세웠다. 이렇게 세워진 두 나라가 바로 소코토국과 간도국이다.
기니
기니의 역사는 11세기 이전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적 기록은 일반적으로 기니의 국가형성 과정이 수단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1445년경 포르투갈인들이 해상을 통해 세네갈 강에 도착했고, 40년 후에는 식민지 포르투갈령 기니를 건설했다.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무역 독점은 네덜란드인의 진출로 와해되었다. 포르투갈령 기니에서 좀더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노예 해안에는 18세기 후반경 아샨티족이 직접 교역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연맹을 창설하고 독일인들이 토고와 카메룬에 식민지를 건설한 반면, 영국은 감비아와 시에라리온, 황금 해안 및 나이지리아를 획득했다.
중앙 아프리카
콩고 밀림지대에 거주하는 피그미족과 같이 몇몇 고립된 부족을 제외하고 중앙 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은 반투어를 사용하는 흑인들이다.
중앙 아프리카의 반투족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0세기경 이후의 아랍 문헌을 통해서이다. 포르투갈인들은 하(下)콩고와 모잠비크 주변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황금 무역에 있어서도 저항에 직면했다. 그래서 그들은 17, 18세기에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 직접적인 개척사업을 모색하게 되었다. 루안다와 켈리마네까지 대탐험(1853~73)을 했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중앙 아프리카가 노예무역으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깨닫게 했으며, 그의 여행기는 노예무역의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한 유럽인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리빙스턴의 탐험에 자극받아 헨리 모튼 스탠리는 중앙 아프리카의 심장부를 탐험했고, 벨기에의 레오폴 2세는 콩고 자유국을 건설했다.
남아프리카
이 지역의 초기 역사는 종족 집단이 계속해서 분열되어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18세기 중엽에는 주요 4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북부 트란스발과 남부 로디지아는 렘바족과 벤다족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동부지역의 림포포 강 하류와 모잠비크 남부는 통가족이, 드라켄즈버그 동쪽 해안평원은 응구니족이, 서부지역은 소토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17세기까지도 남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인들의 세력 확장은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전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희망봉을 경유해 동인도제도에 이르는 좀더 빠른 항로를 개척했다.
1652년 이 회사는 케이프 반도 테이블 만에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소규모의 인력을 파견했다. 최초의 이주민들은 주로 네덜란드인이었으며, 1688년 이후에는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도착했다. 18세기초에 이르자 정착자들은 해안에 만족하지 못해 내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트렉부른(유목생활을 겸하는 농민)으로 구성된 그들 스스로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했다.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이들 보어인(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인)들은 동부와 북동부로 이주했으며, 1770년대 무렵 그들은 그레이트피시 강에 도달했다. 코이코인족과의 갈등으로 인해 1779년 케이프 식민지에서 처음으로 케이프 프론티어 전쟁(카피르 전쟁)이 일어났다. 1795년에는 영국인들이 케이프를 차지했으며, 1802년 케이프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수중으로 들어갔다가 1814년 정식으로 영국에 양도되었다.
동아프리카
초기 기록은 10세기 이래 해안을 따라 활동했던 아랍 무역상들의 무역거점들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의 탄자니아 해안에서 떨어진 킬와는 오늘날의 짐바브웨로부터 황금이 공급되면서 15세기에 무역거점으로서 절정기를 맞았다. 당시에는 상아와 노예 무역도 성행했으며, 동아프리카는 인도 및 아랍과 교역했다. 15세기 말엽 포르투갈인들은 동부해안을 따라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1592년에는 지저스 요새 건설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루부마 강 북쪽에서 가장 중요한 포르투갈인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1696년 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오만의 군대가 몸바사를 공격하여 포위하면서 매우 심각한 위협이 초래되었다. 그 다음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외지인은 프랑스인이었는데, 이들은 노예무역을 부활시켰다. 19세기초 프랑스인들은 영국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영국인들은 동아프리카 지역에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립했다.
아프리카 식민시대
18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열대지역인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데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했으며, 영국이 콜로니 만과 나탈을, 포르투갈은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차지했다. 1899~1902년 남아프리카 전쟁(보어 전쟁)을 계기로 영국이 남아프리카의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모로코와 트리폴리는 독립국가였으나 프랑스가 영국과 이탈리아로부터 모로코에 대한 간섭권을 승인받았고, 반면 영국은 이집트를, 이탈리아는 트리폴리(리비아)를 지배했다. 1919년의 베르사유 평화조약은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의 새로운 구도를 형성시켰다.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는 남아프리카에 위임되었고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영국과 벨기에 사이에 분할되어 탕가니카와 르완다우룬디가 새롭게 생겨났다. 그리고 카메룬과 토고란드는 프랑스와 영국에게 분할되었다. 에티오피아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936년 이탈리아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었다.
아프리카의 민족주의와 독립
20세기 중엽 이후에 탄생된 신생국들은 식민시대 이전의 전통적인 정치단위가 바탕이 되지 않았다. 경제개발계획은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으며, 수송과 산업 및 교육에서의 발전이 대륙의 일부에서 이루어졌다. 이집트·세네갈과 같은 국가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지역 등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소규모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하콩고에서 일어난 킴방구주의나 케냐의 마우마우 봉기 등이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북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이집트에 대한 군사점령은 1947년 종식되었다. 리비아는 1951년 독립을 획득했으며, 이집트와 영국의 공동통치를 받아오던 수단은 1956년 독립하여 공화국을 세웠다. 2개의 프랑스 보호령, 즉 튀니지와 모로코는 1956년 독립했고, 스페인령 모로코는 같은 해 모로코의 나머지 부분과 재통일되었다.
프랑스는 1962년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했다. 영국의 정책에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겨 영국의 여러 식민지가 독립했다. 가나는 1957년에 독립했으며 뒤이어 1960년에는 나이지리아가, 1961, 1965년에는 시에라리온 및 감비아가 각각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1958년 프랑스 연방을 형성함으로써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프랑스 식민지 가운데 기니만이 1958년 독립의 기회를 잡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1960년 독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연방 내에 확산되어 어느 나라든지 독립을 원하면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결과 1962년 이후에는 프랑스령 소말릴란드만이 프랑스 통치하에 있었는데, 이 나라 또한 1977년 지부티 공화국으로 독립국이 되었다.
중앙 아프리카 및 동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 가운데 우간다가 1962년, 케냐가 1963년, 니아살란드(말라위로 국명을 바꿈)와 북부 로디지아(잠비아로 국명을 바꿈)가 1964년에 각각 독립을 이루었다.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남부 로디지아의 백인정부가 영국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남아프리카 형태를 따라 소수백인이 권력을 장악한 이 경찰국가는 1979~80년 흑인들이 다수 정치세력을 형성함에 따라 짐바브웨로 국명을 바꾸었다. 포르투갈 역시 기니·모잠비크·앙골라 등의 해외식민지를 포기하고, 1974~75년 이들 3개 국가의 독립을 인정했다. 기니는 기니비사우로 국명을 바꿨으며, 케이프베르데·상투메·프린시페 등의 섬은 1975년 자유를 얻었다.
1960년 독립하게 된 아이버리코스트는 1986년 코트디부아르로 국명을 바꿨으며,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 속해 있던 다호메는 1960년 독립, 1975년에는 베냉으로 국명을 바꿨다. 어퍼볼타 또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 속한 국가였으나, 1960년 독립했고 1984년에는 부르키나파소로 이름을 바꿨다. 남아프리카 통치하에 있던 나미비아는 1990년 독립국이 되었다. 1991년 남아프리카에서는 지배세력인 소수 백인과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과의 갈등이 폭동의 양상으로 비화되었고, 결국에는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언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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