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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075. 6월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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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137. 12. 3/4, 지금의 오스트리아 브라이텐방 |
국적 | 신성 로마 |
요약
독일의 왕(1125~37), 신성 로마 제국 황제(1133~37).
(영). Lothair Ⅱ (Ⅲ).
로타르 1세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로타르 2세도 독일 왕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그를 로타르 3세라고 부른다. 1125년 로타르 2세가 왕으로 선출된 사실은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주장한 세습에 의한 왕위계승 원칙을 물리치고 선거에 의한 왕위계승 원칙이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주플린부르크 백작 게프하르트의 아들로서 1075년 6월 9일 그의 아버지가 전사하기 며칠 전에 태어났다. 그는 작센의 헬름슈테트 주변에 있는 방대한 토지를 물려받았으며 1088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 대항한 반란에 가담하기도 했다. 1110년 노르트하임과 브라운슈바이비크 양 가문의 상속녀 리헨차와 결혼함으로써 작센에서 가장 막강한 귀족이자 북부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제후가 되었다.
1106년 빌룽 왕조의 마지막 후손 마그누스 공작이 죽자 독일 왕 하인리히 5세는 1104년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 대항했을 때 자신을 도운 대가로 로타르를 작센 공작에 임명했다. 그러나 로타르의 독자적인 태도는 곧 하인리히 5세와 마찰을 빚었다. 1112~15년에 로타르는 하인리히 5세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에 종종 가담했고, 1115년에는 벨페숄츠 전투에서 하인리히를 패배시켰다.
1125년 하인리히 5세가 죽자 로타르는 독일 왕으로 선출되어 아헨에서 왕관을 썼다. 그러나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후계자인 콘라트, 프리드리히(슈바벤 공작) 형제와 로타르 지지자들과의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1127년 콘라트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다. 호엔슈타우펜가는 콘라트가 형식상의 왕으로 있는 동안 몇 년 더 투쟁을 계속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저항은 콘라트가 왕이 된 지 2년 뒤 그들의 거점인 뉘른베르크와 슈파이어가 함락당함으로써 끝이 났다.
1130년 그는 서로 경쟁하는 2명의 교황 후보자인 인노첸시오 2세와 아나클레투스 2세로부터 똑같이 지지를 부탁받았다. 1131년 3월 로타르는 리에주에서 인노첸시오를 만났으며 1132~33년 군대를 이끌고 인노첸시오와 함께 이탈리아로 진군해갔다. 로마의 일부가 아나클레투스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1133년 6월 로타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썼다. 그런 다음 그는 교황의 봉토로서 토스카나의 마틸다가 소유한 방대한 영지를 하사받았다.
1134년 독일로 돌아온 뒤 다시 호엔슈타우펜가와 싸우기 시작한 로타르는 곧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밤베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1135. 3)에서 평화가 선언되었으며 슈바벤은 프리드리히가 다시 차지했다. 1135년 9월 이와 유사한 관대한 조건으로 콘라트도 로타르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로타르는 또한 엘베 강 동쪽 지역에 독일 세력을 확산시키고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1135년 덴마크의 에리크 2세는 스스로 로타르의 봉신임을 선언했으며, 폴란드 군주 볼레수아프 3세는 로타르에게 조공을 약속하고 포메라니아(포메른이라고도 함) 뤼겐을 봉토로 얻었다.
로타르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와의 협정에 따라 1136~37년 제2차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해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2세를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서 몰아냈다. 그는 독일로 귀환하던 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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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로타르 2세(3세)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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