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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테

다른 표기 언어 Donato Bramante
요약 테이블
출생 1444, 우르비노 공국 몬테아스드루발도 근처
사망 1514. 4. 11, 로마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건축가.
Donato는 Donino, Donnino라고도 씀.

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건축에 도입했다. 초기에 밀라노에 있는 산탐브로조 바실리카 사제관과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교회를 지었으며, 로마를 다시 세우겠다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대규모 건설계획의 주임 계획가로 일했다.

그가 수석 건축가로서 활약한 성베드로 대성당은 1506년 착공되었다. 그밖에 로마에 지은 주요작품은 산피에트로인몬토리오 교회의 템피에토(1502)와 바티칸의 벨베데레 궁정(1505경 착공)이 있다.

초기생애

도나토 브라만테는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6세기 전기 작가이자 화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 "읽고 쓰기 이외에 산수 공부도 많이 했다"고 쓰고 있다.

아마도 아버지가 그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이끌었던 것 같다. 1477년까지의 생애와 작품에 관해서는 거의 알 수 없으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1482 죽음) 치하에서 매우 중요한 인문주의의 산실이 된 우르비노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조수로 일했다고 추측된다. 1477년에는 베르가모에서 건축물에 사실적인 벽화를 그리는 화가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우르비노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예술가들의 작품과 여행을 다니며 살펴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리미니·만토바), 안드레아 만테냐(만토바·파도바), 에르콜레 데로베르티(페라라), 필리포 브루넬레스키(피렌체) 등 대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운 듯하다. 젊은시절 그의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일부 역사가들은 많은 수의 건축투시도를 그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어느 정도 그의 특징을 보이지만 각각 매우 다르다. 1477년까지 그는 주로 계획가, 디자이너, 건축투시도 화가로 활동한 것 같다. 그리고 그의 투시도를 다른 예술가들이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자신들의 그림에 삽입하거나 실지로 시공해 보인 듯한데, 나중에는 그가 직접 화가들에게 이러한 건축 투시도를 그려주었다고 한다.

중기생애

1477년 브라만테는 우르비노를 떠나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롬바르디아에 정착했으나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이후 베르가모에 있는 포데스타 궁전(후에 개조됨) 정면에 프레스코를 그렸는데, 이것은 복잡한 건축 배경 속에 고전 철학자들의 모습을 배치한 그림이다. 바사리는 이 시절에 관해 별로 아는 바 없지만 브라만테가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별로 보수도 좋지 않고 가치도 없는 일"을 한 뒤 "밀라노 대성당을 보기 위해" 밀라노에 갔다고 전하고 있다.

이탈리아·독일·프랑스 출신의 공예가들이 교대로 일하던 대성당 작업장은 지식과 설계방법, 기술을 교환할 수 있는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했다. 더욱이 밀라노는 크고 부유한 대도시이자 '일 모로'라고도 불리는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이 다스리던 공국의 수도로서 르네상스 건축이 흘러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이 도시는 브라만테 같은 젊은 건축가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는 곳이었다.

확실하게 그의 것으로 보이는 최초의 건축작품은 1장의 스케치로 남아 있다.

1481년 밀라노의 조각사인 베르나르도 프레베다리가 브라만테의 밑그림을 보고 만든 판화로, 인간 군상이 있는 폐허가 된 신전을 나타낸 것이다. 이 시기에 브라만테는 산타마리아프레소산사티로 교회를 짓고 있었다. 이것은 확실히 그가 설계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건축물이며 지역 색채를 충실히 드러내면서도 알베르티·만테냐·브루넬레스키와 우르비노 학파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보여준다. 우르비노 학파의 영향은 특히 성가대석에 뚜렷이 나타나 있으며, 원근법적으로 칠해져 공간이 더 넓어 보이는 착시를 일으킨다.

그가 장식한 밀라노에 있는 카사 파니가롤라의 방은 사실적인 원근법을 이용한 건축배경과 무장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꾸며져 있는데, 아마도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1480경~85). 역시 같은 시기에, 후에 실베스트리라 불리게 된 밀라노의 카사 폰타나와 같은 건물의 정면에 이와 비슷한 실험을 한 듯하다. 1488년 그는 여러 명의 건축가와 더불어 루도비코 스포르차 및 파비아 주교와 형제인 추기경 아스카니오 스포르차로부터 새 파비아 대성당 건립계획을 작성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파비아에 갔으며 이 건물의 지하묘와 저층부 공사를 지휘한 듯하다.

브라만테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1482년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를 방문했고 1490년에는 브라만테와 함께 밀라노 대성당의 교차부분에 얹을 티부리오의 양식적·구조적 문제에 매달려 있었는데 1487~90년에 두 사람이 여러 번 교류했다는 증거가 있다.

브라만테 자신의 건축개념에 관한 단 하나의 기록은 바로 이 무렵인 1490년에 씌어졌으며 티부리오 문제에 관한 보고서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정4각형 평면안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해결방안을 검토하면서 알베르티의 것과 같은 주목할 만한 건축관을 보여주었다. 이제 그는 영향력 있는 궁정관리뿐만 아니라 루도비코와 아스카니오 스포르차에게서도 호의어린 후원을 받았으나 변변찮은 보수에 그나마 지급도 불규칙해서 풍요롭게 살지는 못했다.

그는 스포르차가(家)의 궁정화가·인문주의자·시인 들과 만나며 직접 시를 쓰기도 했다.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그도 1492년 세례식 같은 스포르차 궁정의 대규모 행사를 위한 무대설치에 관여했다.

그는 건축에 점점 흥미를 느꼈지만 그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16세기의 여러 작가에 따르면 그가 그린 작품이 많다고 하나 보존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키아라발레 대수도원에 있는 〈기둥 위의 그리스도 Cristo alla colonna〉(1490경, 지금은 밀라노의 브레라에 있음)는 그의 것으로 생각되는 단 하나의 이젤 그림이다.

한편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에 있는 복잡한 건축 배경 속의 프레스코(1490경~92)는 제자인 일 브라만티노와 그의 합작품으로 보인다. 1492년부터는 루도비코와 아스카니오 스포르차의 위촉으로 밀라노에 산탐브로조의 사제관(canonica)을 재건하기 시작했다(산탐브로조 바실리카). 작업은 루도비코의 몰락으로 중단되었다가 16세기에 다시 시작되었지만 건물의 한쪽 면만 지어졌다.

그가 맡은 부분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교회의 새로운 내진(tribuna)도 그가 고안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내진은 스포르차 가의 가묘로 정해둔 것으로 1492년 시작된 교회 전체의 종합개축계획에 포함되었다. 또한 실내의 장식을 계획하고 그림도 그린 것으로 추측되나 외부공간 등 상세를 명확히 하고 시공한 것은 롬바르디아의 명인들이었을 것이다.

브라만테가 밀라노를 떠나 마침내 로마로 가기 전인 1490년대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은 여기저기 기록되어 있다.

산탐브로조 사제관에 뚜렷이 나타난 브루넬레스키식 특징으로 미루어, 1492년 여름 브라만테는 피렌체에서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을 연구한 것으로 생각되며, 1493년에는 스위스 국경의 몇몇 요새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루도비코에게 올렸다.

롬바르디아에서 보낸 마지막 몇 년은 남은 그의 생애를 특징짓는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을 말해준다.

그는 비제바노 광장 설계를 맡은 듯한데, 이 광장은 둘레를 명확히 경계지어주는 아케이드 정면 위에 채색된 건축 장식을 곁들여 1492~94년에 시공되었고, 17세기 후반에 부분적으로 개조되었다. 또한 비제바노에 있는 성 내부에 회화 장식(지금은 없음)과 비제바노의 복합건물군 설계도 맡은 것으로 보인다. 밀라노에 있는 스포르체스코 성의 지붕 있는 복도 역시 이 시기 작품이 틀림없으며, 밀라노 근처 아비아테그라소에 있는 산타마리아나스첸테 교회의 정면은 1497년 작품이다.

그밖에 1497~98년에는 밀라노에 있는 산탐브로조 예배당(후에 바뀜)을 지었으며 아스카니오 스포르차의 후원으로 밀라노의 시토회 수도원 건립을 맡았으나 산탐브로조의 사제관 작업과 마찬가지로 1499년 중단되어 미완성이다. 원래 남의 것을 아주 잘 수용하는 성격이었던 브라만테는 밀라노에 있는 다른 예술가들의 영향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고대 후기와 카롤링거 왕조의 롬바르디아 유적을 연구하며 그 영향도 받았는데, 롬바르디아 유물 연구경험은 로마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반대로 그 자신이 남에게 미치는 영향도 막중하여 밀라노에서의 그의 존재는 레오나르도와 더불어 이후 밀라노의 예술발전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

후기생애

브라만테는 1499년 9월 프랑스가 밀라노를 점령해 루도비코가 도피할 때까지 밀라노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브라만테는 성년(聖年)인 1500년을 기념하기 위해 라테라노에 있는 산조반니 교회 그림(지금은 없음)을 그린 것을 비롯해 로마에서 여러 가지 계획에 처음부터 활발히 참여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전속 건축가로서 트라스테베레의 산타마리아 광장과 산피에트로 광장(후에 바뀜)의 분수를 만든 것으로 보이며 몇몇 건축 자문위원회에서 일했다. 이 기간에 그는 설계가로서의 활동을 줄이고 로마와 남쪽의 나폴리까지 포함하는 로마 근처 고대 유적 연구에 몰두했던 듯하다.

한편 나폴리의 부호이자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추기경 올리비에로 카라파를 알게 되었는데, 카라파는 문학·예술·골동품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카라파는 로마에 있는 브라만테의 작품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 꼽히는 산타마리아델라파체의 수도원과 클로이스터(1504 완공)를 맡겼다.

1502년 브라만테는 산피에트로인몬토리오 교회에 '템피에토'라고 알려진 작은 교회를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자리는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곳이다.

1503년 10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선출되자 브라만테의 작업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웅장하고 성숙된 양상을 보였다. 그는 즉시 예술사에서 위대한 후원자로 꼽히는 이 교황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고대 로마 황제의 제국을 되살리려는(renovatio imperii) 교황의 꿈 가운데 건축과 도시계획 분야를 현실화할 연출가가 된 것이다.

이때 설계한 건물들은 전례없이 고대의 건축 어법에 꼭 맞는 거대한 건물군이었고 동시에 고대 어법을 편견없이, 개인적이면서도 시대에 맞게 재현했음을 보여준다.

1505년 브라만테는 거대한 벨베데레 궁정을 설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구(舊)바티칸 궁전의 중심부를 북쪽으로 확장하여 기존의 인노켄티우스 8세의 저택과 연결시킨 공사였다.

공사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나 워낙 규모가 컸기 때문에 1513년 율리우스 2세가 죽고 1514년 브라만테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완공되지 않았다. 이 계획은 16세기와 그후에도 진행되었는데 오늘날 그의 구상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1505년초 그는 그때까지 인류역사에서 가장 야심찬 건물 계획 중 하나이자 가장 위대한 그의 작품인 로마의 새로운 성베드로 대성당을 계획했다. 처음에는 줄리아노 다 상갈로 및 프라 조콘도 등 2명의 건축가와 경쟁하면서 작업을 같이 했다.

당시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교황이 브라만테의 처음 계획을 기각한 뒤인 1506년 4월 18일, 초석이 놓였다. 우선 허물어져가는 낡은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를 부지에서 철거해야 했는데 그는 이 파괴계획에서 능력을 과시해 '파괴의 거장' 또는 '건물 철거의 거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죽을 무렵 새 건물은 겨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교황의 모든 건축계획의 총감독이라는 보수가 좋은 공직을 맡았기 때문에 교황의 수석 건축가이자 군사 공학자, 개인적인 친구 역할도 했다. 벨베데레 궁정과 성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진행하면서 바티칸 궁전들을 완전히 다시 짓자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제출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는 웅대한 규모의 성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진행하면서도 소규모 작업을 계속했다.

1505~09년에 산타마리아델포폴로 교회의 성가대석 증축과 카스텔 산탄젤로의 일부 건축작업, 로카 디 비테르보의 개수작업을 했다. 1506년에는 군사기술자로서 교황을 수행해 볼로냐로 갔다(볼로냐에 있는 팔라초 델리 안치아니의 거대한 계단은 그의 작품이라고 함). 1508년경 새로운 로마를 건설하려는 율리우스 2세의 도시계획이 실행될 당시 브라만테는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체계적인 계획의 틀을 세워 줄리아가(街 : 시스토 분수에서 바티칸에 이르는 거리)에 도시행정의 중심부를 조성할 수 있도록 광장을 설계했고, 바티칸에서 트라스테베레 지구를 가로질러 리파그란데의 하구에 이르는 델라룽가라가를 냈으며 당시 가장 중요한 은행 건물들이 들어선 데이반키가를 산탄젤로 다리 입구에서 확장시켰다.

그밖에 오래된 중세도시 구역 안의 몇몇 거리를 바꾸었다. 또한 줄리아가에 거대한 트리부날리 궁전(1508)을 설계하고 산비아조 교회(1509)와 연결했다. 산비아조 교회는 16세기 건축의 전형으로 주목할 만하다. 브라만테는 종합계획의 틀을 따라 항구의 밑바닥을 더 깊이 파고 치비타베키아에 해양요새를 세웠다. 바티칸 궁전의 서쪽 정면(지금의 산다마소 중정 쪽) 역시 그의 설계에 따라 지어졌으나 후에 라파엘로가 맡아 완성시켰다.

1509년경에는 로카베라노 교회 계획안을 마련한 듯한데, 이 교회의 정면은 16세기 후기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건축양식을 어느 정도 예시한 것이었다.

그밖에 주목할 만한 설계안으로는 보르고에 있는 카프리니 궁전(라파엘로의 집 : 후에 파괴됨)이 있다. 이것은 많은 16세기 궁전 건축의 원형이 되었고 후에 라파엘로가 사들였다. 바사리에 따르면, 1509년경 브라만테는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1508~11, 로마 바티칸)의 배경 건물을 그렸고 그 답례로 라파엘로는 프레스코에서 브라만테를 에우클레이데스로 가장시켜 그렸다고 한다.

브라만테는 나이가 들고 쇠약해졌으나 율리우스 2세가 죽은 후에도 교황 레오 10세의 총애를 받았다.

최근의 불확실한 정보에 따르면, 1513년 티베르 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피하기 위해 대담하게 설계한 로마 시의 수량조절계획을 레오 10세에게 제출했다고 한다. 그해말 폴리뇨(산펠리차노) 대성당 건설의 자문을 위촉받았으나 너무 쇠약해서 수락할 수 없었으며 이듬해에 죽었다. 유해는 성베드로 대성당에 묻혔고 바사리에 따르면 "교황청의 사제와 조각가·건축가·화가 모두가" 그곳으로 유해를 옮겼다고 한다.

성격과 관심사

브라만테는 비록 레오나르도와 율리우스 2세 등 많은 사람들처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마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몰랐기 때문인 듯하며, 그대신 단편적이나마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건축가이자 화가로서, 또한 투시도법에 대한 지식 때문에 그를 존경했을 뿐 아니라 시인, 아마추어 음악가로도 받들었다.

그는 단테에 대해 거의 광적인 관심을 가졌고 사랑과 해학, 종교적인 주제에 관해 약 20편의 소네트를 썼는데 문체는 다소 거칠지만 활기 넘치는 작품이다. 그의 이론적인 저술은 밀라노 성당의 티부리오에 대한 보고서 이외에는 모두 분실되었으나 그 주제가 그의 관심을 암시한다. 예를 들면 투시도법이나 '독일풍'(즉 고딕 건축), 축성법과 그밖의 것에 대한 저술이 있었다.

그는 외향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절했으며 그들을 돕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해학과 아이러니, 지적인 농담을 즐기고 자신을 조롱하는 등 여러 내용이 그의 소네트에 나타나 있다.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꽉 차 있던 그는 역설적인 생각을 제안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무례한 사람이었다.

성직자와 궁정관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깊은 종교적 감흥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배신당하기 쉬운 궁정의 분위기 속에서 교묘하게 일을 처리할 줄 알았으며, 중요한 일을 맡게 될 때는 매우 야심만만하게 굴거나 별로 신중하지도 않았음에 틀림없다. 전기작가들은 브라만테가 작품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데 성급하고 신속했음을 강조하고 있다(바사리의 경우, 그를 단호하고 빠르며 뛰어난 발명가로 생각했음).

이러한 성질은 상상력이 풍부한 천재성과 인위적이고 활기 넘치는 호기심이 결합된 것이다. 실험과 새로운 지식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목마름은 브라만테 자신이 쓴 한 소네트에서 "시대가 순식간에 변하듯이 그를 따르는 나의 생각도 역시 변한다"라고 표현했듯이 그 자신을 끊임없이 변하게 만들었다.

불안정하고 변덕이 심한 그의 성격적 특성이 그로 하여금 인습에서 벗어나 작품 속에서 다양한 태도와 표현을 취하도록 이끌었던 것 같으며, 이런 특징으로 미루어 그가 지녔을 일종의 불만족이나 내적인 우울함, 또는 깊은 고독감을 헤아릴 수 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어쩌면 작업을 통해 끊임없는 시도를 하면서 치료될 수 없는 자신의 불안감에 대한 구제책을 모색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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