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브라만테의 후기생애

다른 표기 언어

브라만테는 1499년 9월 프랑스가 밀라노를 점령해 루도비코가 도피할 때까지 밀라노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브라만테는 성년(聖年)인 1500년을 기념하기 위해 라테라노에 있는 산조반니 교회 그림(지금은 없음)을 그린 것을 비롯해 로마에서 여러 가지 계획에 처음부터 활발히 참여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전속 건축가로서 트라스테베레의 산타마리아 광장과 산피에트로 광장(후에 바뀜)의 분수를 만든 것으로 보이며 몇몇 건축 자문위원회에서 일했다. 이 기간에 그는 설계가로서의 활동을 줄이고 로마와 남쪽의 나폴리까지 포함하는 로마 근처 고대 유적 연구에 몰두했던 듯하다.

한편 나폴리의 부호이자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추기경 올리비에로 카라파를 알게 되었는데, 카라파는 문학·예술·골동품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카라파는 로마에 있는 브라만테의 작품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 꼽히는 산타마리아델라파체의 수도원과 클로이스터(1504 완공)를 맡겼다.

1502년 브라만테는 산피에트로인몬토리오 교회에 '템피에토'라고 알려진 작은 교회를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자리는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곳이다.

1503년 10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선출되자 브라만테의 작업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웅장하고 성숙된 양상을 보였다. 그는 즉시 예술사에서 위대한 후원자로 꼽히는 이 교황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고대 로마 황제의 제국을 되살리려는(renovatio imperii) 교황의 꿈 가운데 건축과 도시계획 분야를 현실화할 연출가가 된 것이다.

이때 설계한 건물들은 전례없이 고대의 건축 어법에 꼭 맞는 거대한 건물군이었고 동시에 고대 어법을 편견없이, 개인적이면서도 시대에 맞게 재현했음을 보여준다.

1505년 브라만테는 거대한 벨베데레 궁정을 설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구(舊)바티칸 궁전의 중심부를 북쪽으로 확장하여 기존의 인노켄티우스 8세의 저택과 연결시킨 공사였다.

공사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나 워낙 규모가 컸기 때문에 1513년 율리우스 2세가 죽고 1514년 브라만테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완공되지 않았다. 이 계획은 16세기와 그후에도 진행되었는데 오늘날 그의 구상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1505년초 그는 그때까지 인류역사에서 가장 야심찬 건물 계획 중 하나이자 가장 위대한 그의 작품인 로마의 새로운 성베드로 대성당을 계획했다. 처음에는 줄리아노 다 상갈로 및 프라 조콘도 등 2명의 건축가와 경쟁하면서 작업을 같이 했다.

당시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교황이 브라만테의 처음 계획을 기각한 뒤인 1506년 4월 18일, 초석이 놓였다. 우선 허물어져가는 낡은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를 부지에서 철거해야 했는데 그는 이 파괴계획에서 능력을 과시해 '파괴의 거장' 또는 '건물 철거의 거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죽을 무렵 새 건물은 겨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교황의 모든 건축계획의 총감독이라는 보수가 좋은 공직을 맡았기 때문에 교황의 수석 건축가이자 군사 공학자, 개인적인 친구 역할도 했다. 벨베데레 궁정과 성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진행하면서 바티칸 궁전들을 완전히 다시 짓자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제출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는 웅대한 규모의 성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진행하면서도 소규모 작업을 계속했다.

1505~09년에 산타마리아델포폴로 교회의 성가대석 증축과 카스텔 산탄젤로의 일부 건축작업, 로카 디 비테르보의 개수작업을 했다. 1506년에는 군사기술자로서 교황을 수행해 볼로냐로 갔다(볼로냐에 있는 팔라초 델리 안치아니의 거대한 계단은 그의 작품이라고 함). 1508년경 새로운 로마를 건설하려는 율리우스 2세의 도시계획이 실행될 당시 브라만테는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체계적인 계획의 틀을 세워 줄리아가(街 : 시스토 분수에서 바티칸에 이르는 거리)에 도시행정의 중심부를 조성할 수 있도록 광장을 설계했고, 바티칸에서 트라스테베레 지구를 가로질러 리파그란데의 하구에 이르는 델라룽가라가를 냈으며 당시 가장 중요한 은행 건물들이 들어선 데이반키가를 산탄젤로 다리 입구에서 확장시켰다.

그밖에 오래된 중세도시 구역 안의 몇몇 거리를 바꾸었다. 또한 줄리아가에 거대한 트리부날리 궁전(1508)을 설계하고 산비아조 교회(1509)와 연결했다. 산비아조 교회는 16세기 건축의 전형으로 주목할 만하다. 브라만테는 종합계획의 틀을 따라 항구의 밑바닥을 더 깊이 파고 치비타베키아에 해양요새를 세웠다. 바티칸 궁전의 서쪽 정면(지금의 산다마소 중정 쪽) 역시 그의 설계에 따라 지어졌으나 후에 라파엘로가 맡아 완성시켰다.

1509년경에는 로카베라노 교회 계획안을 마련한 듯한데, 이 교회의 정면은 16세기 후기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건축양식을 어느 정도 예시한 것이었다.

그밖에 주목할 만한 설계안으로는 보르고에 있는 카프리니 궁전(라파엘로의 집 : 후에 파괴됨)이 있다. 이것은 많은 16세기 궁전 건축의 원형이 되었고 후에 라파엘로가 사들였다. 바사리에 따르면, 1509년경 브라만테는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1508~11, 로마 바티칸)의 배경 건물을 그렸고 그 답례로 라파엘로는 프레스코에서 브라만테를 에우클레이데스로 가장시켜 그렸다고 한다.

브라만테는 나이가 들고 쇠약해졌으나 율리우스 2세가 죽은 후에도 교황 레오 10세의 총애를 받았다.

최근의 불확실한 정보에 따르면, 1513년 티베르 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피하기 위해 대담하게 설계한 로마 시의 수량조절계획을 레오 10세에게 제출했다고 한다. 그해말 폴리뇨(산펠리차노) 대성당 건설의 자문을 위촉받았으나 너무 쇠약해서 수락할 수 없었으며 이듬해에 죽었다. 유해는 성베드로 대성당에 묻혔고 바사리에 따르면 "교황청의 사제와 조각가·건축가·화가 모두가" 그곳으로 유해를 옮겼다고 한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화가

화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브라만테의 후기생애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