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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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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2018)

요약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창건하고 화엄종을 널리 전했다고 알려졌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흥교사라고 불렀다. 의상 이후 혜철을 비롯하여 무염과 징효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1372년 원응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무량수전앞석등(국보 제17호)·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3층석탑(보물 제249호)·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역사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창건하고 화엄종을 널리 전했다고 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의상전에는 의상과 선묘, 부석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자세히 적혀 있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 또는 흥교사라 불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으로 보기도 한다. 의상을 부석존자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 부석종이라 하는 것은 이 절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의상 이후 혜철을 비롯하여 신라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과 징효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만년에 이곳에 머문 원융은 대장경을 인쇄했는데 지금 부석사에 전하고 있는 화엄경판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72년(공민왕 21) 원응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주요 문화재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을 비롯하여 원각전·응진전·안양루·선묘각·범종루·자인당 등 조선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무량수전앞석등(국보 제17호)·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3층석탑(보물 제249호)·당간지주(보물 제255호)·고려판각(보물 제735호)·원융국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등이 있다. 이밖에도 이 절의 창건설화와 관련있는 석룡·대석단·선묘정·녹유전·선비화 등이 전해지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께 등재된 다른 여섯 곳은 양산 통도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 목조건물. 국보(1962.12.20 지정). 1916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에는 원융국사(964~1053)가 1376년에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연대상 서로 차이가 있어 당시 주지로 있었던 원응국사를 잘못 쓴 것으로 추측된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 목조건물. 국보 제18호.

ⓒ Excretion/wikipedia | CC BY-SA 2.0 kr

기단의 동쪽 석면에 새겨진 명문에는 충원군의 석공인 김애선(金愛先)이 기단석을 정리했다고 되어 있다.

화강석의 높은 기단 위에 남쪽을 향해 서 있는데 정면 중앙의 3곳에 돌계단을 두었다. 평면구조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팔작지붕이며 배흘림(엔타시스)이 뚜렷한 기둥이 받치고 있다. 정면에는 각 칸마다 살창을 달고, 측면은 벽으로 막았으며 뒷벽에는 가운데에 판문과 그 좌우로 붙박이 살창을 달았다. 공포는 기둥 위에 첨차와 살미[山彌]를 층층이 짜올린 주심포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첨차 끝부분이 쌍S자형의 곡선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건물 내부에는 높은기둥[高柱]을 배열하고 그 사이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위쪽에는 화려한 닫집[唐家]을 만들었다. 이 건물 내부에서 볼 수 있는 헛첨차와 각 첨차 밑면의 연화두형수식, 주두와 소로의 굽면이 곡면이고 굽받침이 있는 점, 솟을대공 등에 고려시대 주심포 양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 언덕 위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보물 제249호. 높이 526cm.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형식이다. 하층기단은 8매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중석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표현했다. 하층갑석은 6매의 돌로 되었고, 그 윗면에는 상층기단을 받치기 위한 호형과 각형의 2단 굄을 두었다.

부석사3층석탑

부석사3층석탑(통일신라), 보물 제249호, 높이 526cm,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 2015, All Rights Reserved.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상층기단은 각 면에 우주와 탱주 1개씩을 새겼으며, 2매의 돌로 구성된 갑석 밑에는 부연이, 위에는 각형의 2단 굄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과 옥개석을 각각 1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옥신석은 우주만 표현했고 옥개석의 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만 남아 있다. 이러한 석탑 형식은 9세기 중엽에 건립된 보림사 동서3층석탑과 합천의 청량사3층석탑, 산청의 단속사지동서3층석탑 등 통일신라 후기 석탑에서 많이 볼 수 있다.

1960년 석탑을 해체·수리했을 때 3층 옥신에 있는 사리구멍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기단부에서 철제탑·불상파편·구슬 등이 수습되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등.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297cm. 방형의 지대석 위에 기대받침이 있으며, 기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이 2구씩 장식되었고 윗면에는 8각의 연화 하대석이 있다. 연화 하대석에는 귀꽃이 뚜렷한 8개의 복련이 돌아가며 조각되었고 복련 가운데에는 간주석을 받치는 3단 받침이 있다.

부석사 석등

부석사무량수전앞석등(통일신라), 국보 제17호, 높이 297cm,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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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형의 간주석은 가늘고 높은 편이며 상대석에는 보상화무늬가 장식된 앙련이 비교적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 화사석은 8각으로 8면 가운데 4면에 화창을 냈는데 그 주위에 창문을 고정시켰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으며, 다른 4면에는 연화좌 위에 보살 1구씩을 조각했다. 옥개석은 끝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가 가벼운 느낌을 주며 그 아래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일부 파손된 연꽃 모양의 보주가 남아 있다.

이 석등은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약화된 간결한 모습이나 상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석등임을 알 수 있다.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부석사 무량수전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시대 소조불좌상. 국보(1962.12.20 지정). 불상높이 278cm, 광배높이 380cm. 〈무량수전불상개금기문(無量壽殿佛像改金記文)〉에 따르면 1723년(경종 3)에 정상주를 비롯한 신도 94명에 의해 개금되었으며, 1975년에 또 1차례 개금되었다고 한다.

화염무늬

부석사소조불좌상의 두광·신광 주위의 화염무늬, 국보 제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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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이 동쪽을 향해 앉아 있다는 점에서 아미타불로 볼 수 있으나 손 모양이 석가불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이 상의 명칭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절의 동쪽에 있는 원융국사탑비의 비문에 협시보살이 없는 아미타불을 조성하여 모셨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나발이 표현된 머리 위에는 커다란 육계가 얹혀 있고, 얼굴은 양감이 있는 편이나 길게 올라간 눈꼬리라든가 작고 두툼한 입의 표현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넓고 당당한 어깨에 걸쳐진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옷주름은 가슴 앞에서 비교적 촘촘하게 흘러내려 몸의 곡선을 드러내었고 결가부좌한 양 다리 사이에서 부채꼴 형태로 모아져 있다. 광배는 목조로 따로 만들어졌는데 화려한 당초무늬와 화염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두광과 신광에는 7구의 화불을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소조불상은 의상대사가 676년 이 절을 창건했을 때 모셨던 본존의 불상 형식을 그대로 따랐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근엄한 얼굴표정, 당당하면서 안정감있는 모습, 옷주름선의 표현 등은 8세기 중엽의 석굴암 본존불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고려 초기에 많이 만들어진 촉지인 계통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영주 부석사 조사당

부석사 무량수전의 동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목조건물. 국보(1962.12.20 지정).

1916년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에 따르면 1377년(우왕 3)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조사당중창기〉에는 1490년(성종 21)에 중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규모가 작고 세부표현이 간결한 모습이다. 정면 가운데에는 살문을, 그 좌우 옆칸에는 붙박이 살창을 달았다. 옆면과 뒷면은 모두 벽으로 막혀 있다. 기둥은 배흘림이 약화되었고 그 위에는 주두를 얹기 전에 헛첨차를 끼워 공포를 받치고 있다.

건물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집 구조로 대들보 위에 포대공을 앞뒤로 두고 종량을 얹은 다음 사다리 모양의 대공을 얹어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공포의 세부장식이 모두 수직으로 처리되어 있고 대들보가 항아리처럼 불룩하지 않고 길쭉하게 표현된 것은 다른 목조건물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요소이다.

건물 안에는 이 절의 창건자인 의상대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래 입구와 좌우 벽면에 그려졌던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등 고려시대 벽화는 최근에 지은 보호각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 이 건물은 기둥의 배흘림이 약화된 점, 첨차의 끝부분이 직선화된 점, 대들보를 가늘고 길게 깎은 기법 등으로 보아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시대가 내려가는 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부석사 조사당

부석사 조사당의 내부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부석사조사당벽화

부석사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고려시대의 벽화. 국보(1962.12.20 지정). 각 면 길이 약 205cm, 너비 약 75cm. 보살 2구와 사천왕 등 모두 6폭으로 화면의 손상이 심한 편이며, 현재 새로 지은 보호각에 진열되어 있다. 원래는 조사당 안쪽 입구에서부터 사천왕상, 보살상의 순으로 돌아가며 배치되어 있었다.

보살상은 풍만한 얼굴에 높고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옆으로 약간 비튼 측면관으로 서 있다. 훼손이 심해 잘 보이지 않으나 한 상은 합장을 하고 있고, 다른 한 상은 지물을 들고 있는 것 같다. 이 두 보살상은 사천왕과 함께 배치된 것으로 보아 불교의 호법신인 범천과 제석천으로 추정된다. 지국천·증장천·광목천·다문천으로 구성된 사천왕은 갑옷과 투구를 걸친 무인형으로 악귀를 밟고 서 있는데 무서운 얼굴과 건장하고 당당한 자세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위엄이 엿보인다.

지물로는 칼과 창만 알아볼 수 있어 각 상의 명칭을 밝히기가 어렵다. 이 벽화는 조사당의 건립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뒤 몇 차례 보수되어 원래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고려불화의 양식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비교적 오래된 작품으로서 중요한 예이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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