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민족혁명당

다른 표기 언어 民族革命黨 동의어 조선민족혁명당, 朝鮮民族革命黨, 한국민족혁명당, 韓國民族革命黨, 인민공화당, 人民共和黨

요약 1935년 7월 중국 난징[南京]에서 민족주의 정당이었던 한국독립당·조선의열단·미주대한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 등 5개 단체가 통합하여 결성된 통일전선적 성격을 지닌 정당.

한국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이라고도 한다. 토지와 중요산업의 국유화, 인민무장 등의 강령을 내걸고 당면 과제로서 국내 혁명적 대중을 중심으로 한 전민족적 통일전선의 결성과 중국항일전의 참여를 채택했다. 민족혁명당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통일전선 결성에 나서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과 더불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1938년 10월 중국군사위원회의 지원하에 조선의용대 결성을 주도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부터 2년간 중국 남방의 각 전구(戰區)에 배치되어 활동하다가, 1941년 4월 역량의 80% 정도가 화베이로 이동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나, 점차 중국 팔로군에 편입되면서 민족혁명당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조선의용대를 화베이로 북상시킨 민족혁명당은 1941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를 선언하고 이듬해인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 2명의 국무위원, 임시의정원에 다수의 민족혁명당 당원을 의원으로 선출시킴으로써 임시정부에 정식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내에서 임시정부를 개조·확대시켜 전민족의 통일전선기구로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1944년 봄에 국무위원회의 주석과 국무위원으로 김원봉(金元鳳)·장건상(張建相)·김상덕(金尙德)·성주식(成周寔)·최석순(崔錫淳)이 대한 외교적 관계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민족혁명당은 임선출되었고, 이듬해 봄에는 의정원에 독립운동가 대회안을 제출해 관철시켰다. 민족혁명당은 화베이의 의용대에 대한 영향력 회복을 노력하는 한편 미국에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했고, 영국·미국·중국에 시정부에 가담하기 전부터 인도 캘커타(지금의 콜카타)에 민족혁명당 대표부를 두었고 임시정부에 가담한 후에는 미얀마 전선에 광복군의 일원으로 민족혁명당원들을 파견했으며 한길수(韓吉洙)를 통해 미국 국무부와 교섭했다.

해방이 되면서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국내 좌우 세력의 통일에 적극 노력했으나 실패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탈퇴하고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했다. 8·15해방 직후부터 1946년 3월까지 민족혁명당은 주로 간부들 중심으로 임시정부 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나, 중국에서 대부분의 민족혁명당원들이 들어온 4월부터는 당을 점차 복원시켜 나갔다.

1946년 8월 좌익 3당이 통합을 논의하게 되자, 민족혁명당은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인 당 건설을 추진했고, 1947년 여름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보다 적극적인 민주적 임시정부 건설에 노력한다는 취지에서 당명을 인민공화당으로 바꾸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정치이론/사상

정치이론/사상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멀티미디어 더보기 2건의 연관 멀티미디어 김규식(金奎植)


[Daum백과] 민족혁명당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