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1942년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맹. 조선독립연맹은 중국공산당과의 연계하에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조직 기반으로, 반제반봉건민주혁명을 정치노선으로 하여 전민족적 반일통일전선을 수립하고자 했다. 1935년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고, 이것이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당명이 바뀌면서 그 무장력으로서 조선의용대가 조직되었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조선혁명자동맹 등 3개 단체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자 전위동맹도 이에 합류했고, 조선의용대가 다시 편재되었다. 1941년 1월 10일 산시 성 타이항 산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1942년에는 화북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화북의 한국인을 조직, 동원하여 무장투쟁에 나서게 하는 데 활동 목표를 두었다.
개요
중국공산당과의 연계하에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조직 기반으로, 반제반봉건민주혁명을 정치노선으로 하여 전민족적 반일통일전선을 수립하고자 했다.
중심 구성원들은 8·15해방 후 조선신민당을 결성하는 주축이 되었다.
창립
1935년 코민테른 제7회 대회와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의 영향으로 반제민족통일전선의 건설 기운이 높아져가는 가운데 중국 관내의 한인 민족해방운동가들 역시 통일적인 조직체 건설에 노력을 집중했다.
1935년 김원봉(金元鳳)이 지도하는 의열단(義烈團)을 중심으로 한국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고, 이것이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당명이 바뀌면서 그 무장력으로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조직되었다. 한편 반일사상이 강한 진보적 경향의 청년들은 1936년 여름 조선청년전위동맹을 결성하고 민족혁명당 내의 청년들을 묶어내기 위해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최창익(崔昌益) 등 사회주의자들이 깊이 관여했고 이들은 1938년 김원봉의 노선에 반발하여 민족혁명당을 탈당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조선혁명자동맹 등 3개 단체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자 전위동맹도 이에 합류했고 조선의용대가 다시 편재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의 발발로 조선의용대가 본부를 계림(鷄林)으로 옮기자 무력항쟁을 원하던 젊은 의용대원들은 박효삼(朴孝三)의 지휘 아래 조선의용대 제2지대를 중심으로 화북지방으로 이동했다. 또한 최창익·허정숙(許貞淑) 등은 옌안[延安]에서 무정(武亭)과 함께 조선독립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새 조직을 결성할 것을 합의했다. 1941년 1월 10일 산시 성[山西省] 타이항 산[太行山]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창립 직후 광범위한 항일민족통일전선 추진을 위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직하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1942년 7월 10일 청년연합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지역통일전선 조직으로서 화북조선독립동맹을 결성했다.
노선과 성격
강령에서 일제의 조선지배를 전복하고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정권 건립,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 자유 보장, 일제·친일 대기업의 재산과 토지 몰수, 8시간노동제와 사회노동보험 실시, 통일누진세제 실시, 남녀평등 및 의무교육제 등을 규정했다.
이들의 신국가 건설 노선은 독립·자유의 조선민주공화국 수립과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건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반제반봉건민주혁명 노선이었다. 또한 자신의 성격을 한국독립의 쟁취를 위한 지방단체의 하나로 규정하고, 그 대중적 기반을 일제에 반대하는 노동자·농민·군인·학생·지주·기업가 등에 둠으로써 중국 관내의 한인혁명단체를 통일하는 데 목적을 둔 화북지역을 대표하는 지역통일전선임을 명확히 했다.
조직과 활동
중앙 간부진의 구성은 주석 김두봉(金枓奉), 중앙집행위원 무정·최창익·이유민(李維民)·김창만(金昌萬) 등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포괄한 통일전선적 성격으로 이루어졌다.
전체 조직은 단일적 대중조직의 지도부를 구성하는 중앙과 직접적 대중조직 기구인 지부, 경제위원회, 윤함구 공작위원회 등의 특별위원회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무장투쟁 수행과 간부양성을 위해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우고 군사부하에 박효삼을 사령으로 하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를 두었다. 이런 조직을 바탕으로 선전과 적구(敵區) 공작을 통해 화북의 한국인을 조직, 동원하여 무장투쟁에 나서게 하는 데 활동 목표를 두었다. 특히 요문구전투, 백초령전투, 화순전투 등에 참여하여 직접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민족해방운동 세력간의 통일을 위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동북항일연군, 건국동맹 등과 접촉하여 전민족 반일통일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다.
1945년 소련군의 대일참전 때는 조선의용군 사령부를 따로 설치하여 만주에서 한인(韓人) 조직사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보조역량으로서 활동이 이루어졌고 화북의 조선인이 유랑민적 존재였다는 점에서 활동과 대중적 기반의 한계를 가졌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