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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30년대 중반 해외 특히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이 정당활동을 중심으로 전개한 민족독립운동의 한 형태. 한국독립당, 한국혁명당, 조선혁명당, 한국동지회, 의열단의 5당 대표가 결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들은 독립운동전선의 대동단결을 주장하여 임시정부 주류파들에게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5년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 기반이 되어 동맹 자체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핵심당원들이 탈퇴하여 다소 약해졌지만 좌익과 우익 진영에서 전선 통일을 지지하여 1939년 전국연합진선협회로 결실을 맺었고, 이로 인해 민족연합전선은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통일국가 건설에 이바지했다는 면에서 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국내의 민족독립운동은 활기를 띠지 못했다.
특히 1920년대 후반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조직을 통합하고 좌우익으로 나누어진 독립운동전선을 통일하려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좌절되자, 1930년대 이후 국내의 독립운동이 침체의 늪에 빠졌다. 이에 비해 중국지역을 중심으로 한 국외운동은 1931년에 일어난 만주사변을 계기로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점차 연합전선을 형성하면서 해방 후의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을 준비해나갔다. 이때 민족연합전선을 결성하려는 시도는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의 정당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1932년 11월 상하이[上海]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조직되었다.
이는 김규식(金奎植) 등의 노력으로 한국독립당 대표 이유필(李裕弼)·차이석(車利錫), 한국혁명당 대표 윤기섭(尹琦燮)·성준영(成駿永), 조선혁명당 대표 최동오(崔東旿)·유동열(柳東說), 한국동지회 대표 김규식, 의열단 대표 김원봉(金元鳳) 등 5당 대표의 결속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동맹은 독립운동전선의 대동단결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동맹에 가담한 단체는 물론, 가담하지 않은 독립운동단체와 임시정부까지도 해체를 주장하여 임시정부 주류파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동맹은 1935년 7월 제3회 대회 때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의열단, 대한독립당(하와이), 북미국민회(로스앤젤레스), 동지회(하와이), 뉴욕 교민회 등을 대표하는 조소앙(趙素昻)·김원봉(金元鳳)·김규식(金奎植)·신익희(申翼熙)·이청천(李靑天)·차이석(車利錫) 등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 기반이 됨으로써 연합전선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후 민족혁명당은 이청천·최동오 등 일부 핵심당원들의 탈퇴로 연합전선적 성격이 다소 약화되었으나, 1938년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민족해방자동맹·조선혁명자연맹·조선혁명전위동맹 등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이로써 중국전선에서나마 좌익 진영을 통합하여 민족연합전선의 기초를 마련했다. 한편 임시정부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진영에서도 전선 통일을 지향하여 김구(金九)를 이사장으로 하는 한국국민당을 결성했고(1935), 이어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조소앙 중심의 한국독립당, 이청천 중심의 조선혁명당, 하와이의 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하게 되었다(1937). 이처럼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의 두 연합체로 통일되었던 민족연합전선운동은 1939년 전국연합진선협회(全國聯合陳線協會)라는 단일전선조직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결성 당시 김구·김원봉의 연명으로 발표된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장'에서는 "여하한 방법에 의하여 민족적 통일기구를 구성하더라도 그 기구는 현 단계의 전민족적 이익과 공동적 요구에 의한 정강 아래 여하한 주의, 여하한 당파도 그 산하에 포용하여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함으로써 민족연합전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에 따라 전국연합진선협회는 그 정강에서 민주공화국의 건설, 국내의 일제 공공재산 및 매국적 친일파의 재산몰수, 남녀평등,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국가적 위기시 기업 국유화, 토지의 농민분배 및 매매금지 등을 규정했다. 이것은 그 이전에 산발적으로 독립운동을 펴나가던 정당들의 정강과 별 차이가 없으며, 연합전선에 참여하지 않고 옌안[延安]의 중국공산당 영향 아래 있던 조선독립동맹의 정강과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민족연합전선은 독립운동의 오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해방 이후 민족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반면 중국전선 이외의 국내와 만주지방까지 연결되지는 못했으며, 그로 인해 민중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는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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