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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정당.
결성 이후 한국독립당은 재건(1935. 9)·통합(1940. 5)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그 조직이 변화했다.
1920년 후반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임시정부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와 민족진영의 단합과 쇄신을 도모하고 종래의 파벌적 감정을 청산하여 해외독립운동전선을 통일하기 위해 1930년 1월 25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했다. 초대 이사장에는 이동녕, 이사에는 김구(金九)·조완구(趙琬九)·김철(金澈)·안창호(安昌浩)·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이 선임되었다.
이동녕·안창호·이유필·조완구·김두봉·안공근(安恭根) 등이 삼균주의에 입각하여 ① 국내민족에 대하여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혁명역량을 집중한다, ② 엄밀한 조직하에서 민족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 진행한다, ③ 세계 피압박민족의 혁명운동단체와 함께 협력을 도모한다는 당책과 당강을 작성했으며, 강력한 항일투쟁을 표방했다.
또한 기관지 〈상해신문 上海新聞〉을 발간하여,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들에게 임시정부의 활동상황 등 독립운동에 관한 것을 선전했다. 그리고 의열투쟁으로 1932년 3월 이덕주(李德注)·유진만(兪鎭萬)의 한국 잠입 및 조선총독 처단계획과 같은 해 4월 유상근(柳相根)·최흥식(崔興植)의 일본관동군사령관 폭살계획에도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한편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중국본토 침입이 본격화되자, 1932년 11월 10일 조선혁명당·조선의열단·한국혁명당·광복동지회 등과 연합하여 조직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가했다.
한편 1932년 6월 중국측으로부터 기증된 독립운동자금의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한 항저우 사건[杭州事件]으로 인해 한국독립당은 김구계열, 김철·조소앙계열, 이유필계열 등으로 대립했다.
이에 1933년 1월 상하이에서 유호한국독립당대회를 개최하여 상하이 의거 이후의 한국독립당의 활동과 조직을 점검하고 향후 활동방향을 논의했으며 간부를 재선출했다. 당시 선임된 간부는 엄항섭·안공근 등 김구계열의 인물이 이사직에서 배제되고, 박창세 등 이유필계열의 인물이 대거 등장했다. 그리고 외곽단체로서 상해한인청년당·상해한인연해국부인회·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상해한인소년동맹 등을 조직하여, 청년운동·부인운동·소년운동 등 독립운동 각 부문에서 대표적인 통합단체로 육성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했다.
그러나 1933년 3월 이유필이, 같은 해 10월 12일 이사 겸 총무부원인 이수봉(李秀峰)이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송병조·박창세 등이 1933년 8월 발생한 옥관빈(玉觀彬) 등 친일주구배 처단사건에 연루되어 상하이에서 피신했다. 그리고 김구 또한 상하이 의거 이후 난징 군관학교 내 한인특별반 창설에 주력하고, 김두봉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상무위원으로 난징에 거주하는 등 한국독립당 주요간부들이 중국 각지에 흩어져 한국독립당은 1933년말경부터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독립당은 1934년 1월말까지 상하이에 있던 본부를 항저우로 옮기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이후 기관지 〈진광 震光〉을 발행하여 반일혁명세력과의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주의·이론을 주장하는 한편, 1934년 3월 3일에는 강병학 의사의 제2차 홍커우[洪口] 공원의거라 할 수 있는 '상하이 신사 투탄의거'(上海神社投彈義擧)를 계획·주도했다. 이 의거는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 당시 죽은 일본 군인들에 대한 초혼제에 참석하는 일본군 고관암살을 목적으로 특무대장 박창세가 송병조·조소앙 등과 협의하여 결행한 한국독립당의 무력적 파괴행동이었으나, 폭탄불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항저우 본부 이외에 항저우 특구회(特區會), 광둥[廣東]·난징·베이징[北京]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간부진을 개편했는데, 이는 독립운동계의 전반적인 부진으로부터의 탈피와 세력기반을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다시 일제 관헌의 감시를 피해 쑹장[松江]으로 이전했다.
한편 중국관 내 통일전선운동은 한국대일전선동맹의 결성으로 운동전선의 통일에는 일차적으로 성공했으나, 동맹은 연락기관적 역할밖에 못했다.
이에 이 동맹을 기초로 한 단일대당(單一大黨)·민족유일당을 조직하자는 논의가 제창되자, 한국독립당 내에는 신당에 찬성하는 파(조소앙·박창세 등)와 임시정부를 사수하자는 파(송병조·차이석 등)로 분열되었다. 1935년 5월 개최된 당대회에서 신당참가파가 승리함에 따라 조소앙 등 대부분의 당원이 민족혁명당에 참가하고, 한국독립당의 해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의열단의 당권을 장악하고 조직 및 자금 면에서의 열세로 대항할 수 없게 되자, 같은 해 7월 5일 민족혁명당을 탈퇴하고 신한혁명당과 합동하여 한국독립당의 재건을 선언했다.
그리고 민족혁명당에 불참한 김구를 비롯한 임정고수파는 1935년 11월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여 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민족혁명당에 대항했다. 1937년 1월 민족혁명당 전당대표회의에서 서기국 총서기로 선임된 김원봉이 민족혁명당의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2월 이청천·최동오 등은 민족혁명당을 탈퇴하고 4월 조선혁명당을 다시 조직했다.
이로써 중국관 내 민족주의진영은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3당으로 정립되었으며, 이들 3당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효과적인 대일항전을 위해 3당연합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한국국민당 송병조가 재건한국독립당의 홍진, 조선혁명당의 이청천과 난징에서 회의를 갖고 3당합동에 대한 구체적인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를 토대로 같은 해 8월 1일 민족 3당 이외에 대한인국민회·한인애국단·대한부인구제회와 함께 우익진영의 연합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이후 또한 좌익계열인 민족전선연맹과 제휴를 시도하여 1939년 7월 전국연합진선협회를 조직했으나, 이념적 대립으로 실패했다. 이에 따라 1940년 5월 8일 우익 민족 3당인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은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통합된 한국독립당 간부는 집행위원장 김구, 집행위원 홍진·조소앙·조시원(趙時元)·이청천·김학규(金學奎)·유동열(柳東說) 외 14명이었으며, 감찰위원에는 이시영 등 3명이었다.
통합된 한국독립당은 3당의 과거를 역사적으로 계승하고, 1930년대 이후 우익독립운동계에서 널리 수용되었던 삼균주의를 근간으로 이루어졌다. 표방한 당의는 혁명적 수단으로 일제를 박멸하고 국토·주권을 완전히 광복하며 정치·경제·교육의 평등한 기초 위에 신민주국가를 건설하는 것과 안으로 균등생활을 보장하고 밖으로 세계일가(世界一家)의 노선으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강은 완전한 광복을 통한 대한민국의 건설, 보통선거제의 실시를 통한 정치적 균등, 의무교육을 통한 교육적 균등, 광복군 편성과 의무병역 실시 등이었다. 3당이 통합된 1940년의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 그 자체였으며, 당 간부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과 임시의정원을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당의 정책이 곧 임시정부의 정책이었다. 이는 중국국민당과 마찬가지로 이당치국(以黨治國)의 형태를 취한 것이었다.
특히 1940년 4월 3당 통합을 위한 대표회의에서 중국 영토 안에서 한국광복군이 성립될 수 있도록 중국 정부에 승인을 요구하는 결의를 했으며, 다음해 5월에 장제스[蔣介石]의 승인을 받아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총사령부 성립대회를 개최했다. 한국독립당은 한국광복군을 어느 당파의 군대가 아니라 한국 군대임을 강조했으며, 이에 따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및 나월환의 한국청년전지복무대도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또한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선언하고, 1943년에는 미국 주재 외교위원부를 강화하여 이승만(李承晩)을 대표로 임명하고 임시정부승인과 군사원조 등에 관한 국제간 외교과제를 처리하게 했다. 이어 1942년 10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이 차례로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다수가 임시정부 각 원에 참가함으로써 중국관 내 항일운동의 통합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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