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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독립운동

다른 표기 언어 武裝獨立運動

요약 폭력을 통해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운동. 독립전쟁론은 1905년 전후 반일의병운동에서 출발했으나,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계몽운동 계열의 인사들이 주축이 된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 내에서 점차 2가지 노선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준비론'(실력양성론)이고, 다른 하나는 신채호·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한 '독립전쟁론'이었다. 독립전쟁론을 주장한 사람들은 국권회복의 가능성이 거의 절망적이었던 1909년 봄부터 만주지역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하고 무장단체를 조직해 독립군들을 길러 일본에 타격을 주었다. 이후 중국 관내의 무장독립단체들은 점차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편제되었다. 또 1930년대 이래 만주지역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나 일제의 만주침략에 맞서 중국공산당과 연합해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일제의 조선침략에 대한 무장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인 '독립전쟁론'은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마련되었다.

조선지배 야욕을 더욱 노골화했던 일제의 침략에 맞서서 한말 국권회복운동은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2가지 조류로 전개되었다. 원래 독립전쟁론은 1905년을 전후한 반일의병운동에서 출발했으나,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계몽운동 계열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 내에서도 점차 2가지 노선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준비론'(실력양성론)이고, 다른 하나는 신채호·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한 '독립전쟁론'이었다.

이처럼 독립전쟁론을 주장한 사람들은 이미 국권회복의 가능성이 거의 절망적이었던 1909년 봄부터 남만주지역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했다.

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해 일제와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독립군이 국내로 진공하고 동시에 국내에서는 이에 호응, 일거에 봉기해 무력항쟁으로 국권회복을 한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1911년 류허 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에서 경학사를 창건하고, 신흥강습소를 개설했다. 경학사는 1912년에 부민단으로 발전해 근거지를 퉁하 현[通化縣] 하니허[哈尼河]로 옮겼고, 신흥강습소도 신흥학교로 발전했다.

신흥강습소 터

ⓒ Lifesavior/wikipedia | CC BY-SA 4.0

경학사(부민단)는 1910년대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가 되었으며, 신흥강습소는 실질적인 무관학교로서 이후 수많은 독립군 간부를 길러냈다. 한편 합병을 전후한 2차례에 걸친 일제의 대토벌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진 의병출신들도 점차 남만주·북만주, 혹은 노령 연해주지역으로 옮겨와 많은 무장단체들을 조직했다.

1919년의 3·1운동은 이러한 무장독립단체들의 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에 고조되어 수많은 단체들은 점차 보다 큰 단체로 발전했다. 남만주지역에서는 대한독립단(1919. 3)·대한청년연합회(1919. 4)·서로군정서(1919. 4, 임정직할) 등이 출현했고, 이들 단체들은 다시 대한통의부(1921. 9)로 통합해 남만주지역의 독립군을 망라한 강력한 무장독립단체로 발전했다.

한편 북만주지역에는 간도국민회(1919. 10)·정의단(1919. 3)·의군부(1919) 등이 조직되었고, 이들 단체들은 다시 대한독립군단(1921)으로 통합해 북만주지역에서 강력한 독립운동단체를 형성했다.

3·1운동 이후 큰 단체로 성장한 독립군들은 점차 한만국경을 건너 국내진공작전을 실시해 일제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전투는 1920년 6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등 약 700명이 연합해 침입해오는 일본군을 격멸한 봉오동전투와, 같은 해 10월에 있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군 등 2,000여 명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허룽 현[和龍縣] 일대에서 5,000여 명의 일본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청산리전투였다.

이들 항일단체들은 1920년대 중반 주로 남만주지역을 활동중심으로 한 육군주만참의부(1924. 5, 임정직할)와 정의부(1925. 1), 북만주지역을 활동중심으로 한 신민부(1925)로 각각 통합해 무장항일투쟁을 이끌었다. 이들 3부는 1926년부터 국내외를 망라해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자는 노력에 힘입어 민족유일당운동에 참가해 3부를 통일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28년 3부통일과 유일당 조직에 대한 회의가 성과를 얻지 못하자, 각 부는 혁신의회·한족총연합회(1929)와 국민부(1929. 3)로 양분되었다.

이후 한족총연합회를 기반으로 1930년 7월에 한국독립당이 수립되었고, 당 군으로 한국독립군이 설치되어 북만주·동만주 일대에서 활약했고, 국민부는 1929년 3월에 조선혁명당을 수립하고 당 군으로 조선혁명군을 설치해 남만주 일대에서 활약했다.

이들 두 단체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가 실질적으로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반만중국군(反滿中國軍)과 연합해 투쟁을 계속했으며, 영릉가전투·대전자령전투 등에서 큰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일제가 만주국을 건국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취함에 따라 1930년대 중반까지 점차 중국 관내로 이동했다. 이 시기 이후 중국 관내에서 활약한 독립단체는 민족혁명당(1935. 7)과 한국국민당(1935. 11)이 대표적이며, 민족혁명당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분리해나가면서 중국 관내의 무장독립단체들은 점차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편제되었다.

이밖에도 1930년대 이래 만주지역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나 일제의 만주침략에 맞서 중국공산당과 연합해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단체들로는 만주지역의 동북항일연군 및 조국광복회, 화북지방의 조선독립연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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