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초기활동
1920년 본부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겨 상해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던 한국인들의 재정적·인적 도움을 받았다.
1920년 6월 제1차 암살·파괴 행동에 필요한 폭탄과 권총을 중국에서 밀양으로 운반했으나, 도중에 황상규·한봉근·윤세주 등이 일제 경찰 김태석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20년 9월 박재혁(朴載赫)의 '부산경찰서투탄의거', 같은 해 11월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투탄의거', 1921년 9월 김익상(金益相)의 '조선총독부투탄의거', 1922년 3월 오성륜(吳成崙)·김익상·이종암의 '상해황포탄저격의거' 등의 격렬한 암살·파괴 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이승만(李承晩)의 미국위임통치론에 반대하여 신채호(申采浩) 등이 임정 불신임, 국민대표회의소집운동을 제창하자 이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1922년 국민대표회의 세력이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자, 이들을 기관만능주의로 비판하고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2차 암살·파괴 운동을 계획하여 같은 해 6월 이종암·최용덕(崔用德)을 국내에 파견해 조선무산자동지회장 김한(金翰)과 접촉, 행동준비를 했다.
그러나 1923년 1월 김상옥(金相玉)이 독자적으로 '종로경찰서투탄의거'를 감행한 뒤 일경의 대대적 검속으로 김한이 체포되었다. 이후 국내에서의 암살·파괴운동 준비는 김시현(金始顯)과 현직 경부 황옥(黃鈺)이 담당했다. 이들은 영국인 쇼우를 끌어들여 폭탄과 선전문건을 국내로 반입했으나, 1923년 3월 밀정의 밀고로 관련자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후 상하이로 본부를 옮기고 개조파와 연합하여 임시정부의 개편과 사회주의계열의 적기단(赤旗團)과의 제휴를 모색하는 한편, 국내에서 모금활동을 했으나 일제의 집요한 추적과 부호들의 거부로 실패했다.
이에 대규모 테러 계획은 포기하고 소규모의 암살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1924년 1월 김지섭(金祉燮)의 '도쿄니주바시[東京二重橋] 폭탄투척의거', 1925년 10월 이종암 등의 '경북의열단사건', 1926년 12월 나석주(羅錫疇)의 '동척·식산은행투탄의거' 등을 전개했으나, 개인적 테러 활동의 한계가 드러남에 따라 방향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강령과 노선전환
창단 초기에는 강령이 명시되지 않았으나, '구축왜노'(驅逐倭奴)·'광복조국'·'타파계급'·'평균지권'(平均地權)의 4개항이 지향이었다.
그리고 김원봉이 1923년 1월 베이징에서 신채호에게 부탁해 작성된 '조선의열단' 명의의 〈조선혁명선언 朝鮮革命宣言〉은 '강도 일본'에 대한 '직접혁명'이 필연적이며, 외교론·준비론 등 실력양성론자들을 강도 일본과 타협하는 적으로 비판하고, 파괴의 대상은 이족통치(異族統治),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균형, 노예적 문화사상 등이라 하여 민중폭력혁명노선을 단의 이념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1924년에 들어 사회주의·무정부주의가 유입되면서 윤자영 등은 상해청년동맹을, 유자명 등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각각 결성하여 의열단을 탈퇴했다. 특히 청년동맹은 의열단을 '공포론자'로 비판하면서 독립운동과 사회·정치 운동의 결합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의열단 내부에서도 그동안의 성과에 비해 희생이 컸고, 충격효과에도 불구하고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음을 반성해, 테러에 의해 촉발된 민중봉기로 단숨에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환상이며, 국내의 대중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이에 맞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기되었다.
1925년 소수 투사들의 자유결합에 의한 폐쇄적 비밀결사의 틀을 벗고, 대중의 장기적 조직화와 그에 기반한 무장투쟁노선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후기활동
1924년 김원봉은 광저우[廣州]에서 중국국민당 인사들을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고, 다음해 본부를 광저우로 옮겼다.
1926년 1월 김원봉 이하 단원 12명은 황포군관학교 4기로 입학하여 민족해방운동에서 대중운동이 차지하는 위치, 군사이론 및 실전 등을 학습하고 같은 해 10월에 졸업했다. 그동안 김원봉·김성숙·장지락 등은 황포군관학교·중산대학(中山大學) 졸업생들을 의열단에 포섭하는 작업을 계속하여 단원은 100여 명이 넘었다. 또 광저우에 모여든 청년층 활동가들을 정파·출신에 관계없이 통괄, 대표하는 유오한국혁명동지회(留奧韓國革命同志會)를 조직했고, 우창[武昌]에도 외곽단체로서 우창한국청년회를 조직했다.
이런 기반 위에서 1926년 겨울 총회를 열어 혁명정당을 세워 운동해야 한다는 인식하에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으로 확대·개편했다. 이어 민족주의적 강령과 정책을 채택하고 김원봉을 당수로, 김성숙·오성륜 등을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
민족혁명당은 중앙집행위원회를 광저우에 두고 활동했으나, 1927년 국공분열로 체제를 갖추기도 전에 유명무실해져 의열단으로 환원되었다. 1928년 10월 상하이에서 제3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제국주의타도'·'조선독립만세'·'전민족적 혁명적 통일전선'·'자치운동타도'의 4대 슬로건과 20대 강령을 발표하고, 지금까지의 유일당운동 대신 국내의 광범한 노농대중에 기반한 조직적 투쟁을 주로 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내부 분열로 좌파단원들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광둥[廣東] 봉기에 참가했고, 김원봉 이하 소수단원들은 베이징으로 본부를 옮겼다.
베이징에서 제3차 조선공산당 간부였던 안광천 등과 연대, 1929년 12월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을 결성하여 연합전선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잡지 〈레닌주의〉 발행 및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한 뒤, 졸업생들을 서울·평양·강릉·원산 등에 파견하여 비밀지부를 결성하게 했다. 그러나 1933년 종연방직 파업을 계기로 전원 체포되어 동맹의 국내 기반은 붕괴되었다.
한편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제5차 대표회의를 열고 중국국민당과 항일제휴를 결정한 뒤, 상하이에서 김원봉이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 서기 텅제[謄傑]를 만나 재정을 지원받았으며, 1932년 10월 국민당의 도움으로 난징[南京]에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를 개교하여 민족혁명의 간부 양성에 주력했다. 1933년 6월 제7차 대표회의에서 노농혁명과 무장투쟁 등의 내용이 첨가된 개정강령을 채택하고 간부학교 졸업생 이육사·노석성 등을 국내에 파견했으나, 모두 일제에 체포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