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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9(고종 26), 평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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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3. 9. 16 |
국적 | 한국 |
호 | 의산(義山) |
요약 독립운동가·정치가.
개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전선통일운동에 힘썼고, 8·15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국가 수립운동에 주력했다. 일명 최학원(崔學源)·지석호(池錫浩). 호는 의산(義山).
독립운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의상해기성회(國民代表會議上海期成會)의 추천위원으로 참여하여 조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만주에서 군정학교(軍政學校)를 설립하여 군사교육에 힘썼다. 1929년 3월 군정위원회의 성격을 띤 국민부의 외교위원장이 되었으며, 그뒤 국민부의 유일당(唯一黨)인 조선혁명당의 국제부장에 선임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만주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관내(關內)로 이동했다. 1932년 11월 중국 관내의 민족해방운동단체를 결집시키려는 노력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활약했으며, 이듬해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장에 선임되었다. 1935년에는 조선혁명당의 당수가 되었다. 그해 7월 난징[南京]에서 통일전선정당으로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양기탁(梁起鐸)·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직을 사임하고 신당 결성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 및 선전부장이 되었다. 1937년 4월 김원봉(金元鳳)과 지청천(池靑天)의 알력으로 그를 비롯한 11명이 민족혁명당에서 제명처분당하자 지청천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결성했다. 1939년 11월 차이석(車利錫)을 대신해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8·15해방될 때까지 활동했다. 1940년 5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자 중앙간부로 선출되었다.
해방 후의 활동
8·15해방이 되자 1945년 11월 귀국했다. 1946년 2월 중경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하여 의회로서 기능할 것을 자임한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7월에 구성된 좌우합작위원회의 우측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10월 경상북도지방을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朝美共同騷擾對策委員會)에 참여했고, 12월에는 미군정이 주도하는 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뽑혀 부의장이 되었다.
1947년 1월 김구(金九)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2차 좌우합작운동 때는 1946년 9월에 결성된 신진당(新進黨) 소속으로 우측위원에 선임되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으로 갔다가 그곳에 머물렀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집행위원 겸 상무위원이 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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