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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다른 표기 언어 新興武官學校

요약 일제 강점기 간도 지방에 있었던 군사학교. 1910년 항일결사단체 신민회를 주도한 이회영, 이시영 형제와 이동녕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설립했다. 첫 이름은 '신흥강습소'였으며, '신흥중학' 등 여러 이름으로 개칭하였다가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류허 현 고산자에 2년제 고등 군사반을 두어 고급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분교를 두어 초등 군사반을 편성하여 훈련을 시켰다. 1920년 폐교할 때까지 졸업생 2,000여 명을 배출하여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가 해방 후 신흥대학을 세운 자리

ⓒ Lifesavior / wikipedia | CC BY-SA 4.0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독립군 양성 기관. 1911년 만주 서간도 지역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로 출발하여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했다. 학교 명칭은 이외에도 시기에 따라서 대동중학교(大東中學校)·신흥중학교·양성중학교(養成中學校) 등으로 불렸다. 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1910년 7월경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의 6형제와 이동녕(李東寧) 등이 남만주의 류허 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 쩌우자 가[鄒家街] 지역을 사들여 망명 근거지로 삼았다.

이들은 이곳에서 신민회의 '신'자와 다시 일어난다는 의미의 '흥'자를 붙여 신흥강습소를 조직했고, 동시에 민단(民團) 성격의 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조직했다. 그러나 1911년 가을의 큰 흉작으로 경학사가 해체되고 1912년 가을에 새로운 한인자치조직으로 부민단이 조직되자, 신흥강습소는 퉁화 현[通化縣] 하니 강[哈泥河]으로 이전했고, 1913년 5월에는 학교명칭을 신흥중학으로 개칭했다. 특히 3·1운동 이후에는 많은 청년들이 만주로 들어오고 일본육사 출신의 지청천(池靑天)·김경천(金擎天) 등이 망명해 신흥학교에 참가하면서 번창했다.

1919년 5월에는 학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했고 부민단이 개편되어 조직된 한족회 산하의 학교로 발전했다. 신흥강습소에서는 일반 중학과정인 본과 외에 무관양성을 위한 속성과를 두었으며, 신흥중학교에서는 4년제 본과와 6개월 또는 3개월 과정을 두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되면서 류허 현 고산자에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간부를 양성하고자 했다. 또한 퉁화 현 하니 강, 치다오거우[七道溝] 콰이다마오쯔[快大帽子] 등에는 분교를 두어 초등군사반을 편성하여 3개월간의 일반훈련과 6개월간의 후보훈련을 시켰다. 1920년 폐교시까지 졸업생 2,000여 명을 배출하여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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