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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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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독립운동단체. 1907년 조직된 신민회 임원들은 중국 동북지역 일대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삼고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한편, 이회영을 서간도로 파견하여 장소를 물색했다. 그리하여 1910년말부터 1911년초에 걸쳐 가족 단위로 이주하여 1911년 4월 경학사를 설립했다. 경학사는 식산흥업·교육구국론에 입각하여 생산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병농일치의 원칙에 따라 농업개발과 군사교육, 기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부설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도 설치했다. 그러나 경학사는 흉작으로 인한 운영난과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1914년 해산되었다. 그후 경학사의 조직경험은 중국 동북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신흥강습소는 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어 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1907년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 임원들은 식민지화가 임박하자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중국 동북지역 일대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전국 각도별 책임자를 선정하여 독립운동 기지 창설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한편, 이회영을 서간도로 파견하여 장소를 물색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910년말부터 1911년초에 걸쳐 이회영의 5형제와 이상룡·김창환·이동녕·여준·이탁 등이 가족 단위로 이주하여, 삼원보 주변의 토지를 구입하고 1911년 4월 경학사를 설립했다.

경학사는 계몽운동의 이념이었던 식산흥업·교육구국론에 입각하여 생산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명칭도 이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병농일치의 원칙에 따라 농업개발과 군사교육, 기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을 주된 활동목표로 삼았다. 경학사 설립과 동시에 부설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도 설치했다. 그러나 경학사는 1912년에 흉작으로 곧바로 운영난에 부딪힌 데다가 중국 관헌들의 탄압이 겹쳐 1912년 해산되었으며, 그 사업은 같은 해 조직된 부민단에 인계되었다.

경학사는 3년 정도밖에 유지하지 못했으나, 그 조직경험은 그후 중국 동북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신흥강습소도 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어 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으로 자리잡았다.→ 부민단, 신민회, 신흥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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