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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자학

다른 표기 언어 反朱子學

요약 임진년·병자년의 양란을 겪은 후, 종래 조선사회를 이끌어왔던 지배이념인 주자학(朱子學)이 퇴색함에 따라 이를 대신할 새로운 사상체계로서 수용되거나 발생한 양명학(陽明學)·서학(西學)·실학(實學)·민중신앙(民衆信仰) 등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 임진왜란, 병자호란).

17세기의 조선사회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큰 변화와 갈등을 겪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의 결과로 중국에서는 명·청 왕조교체를, 일본에서는 전국의 통일과 도쿠가와바쿠후[德川幕府]의 성립을 보았다. 조선은 왕조의 붕괴는 면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사회 내부의 변동을 겪어야만 했다.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력과 재원(財源)이 필요했으며, 전쟁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 정부지배층의 무기력과 분열은 지배체제의 동요, 사회기강의 이완현상으로 직결되었다.

이에 양반집권층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통해 국왕을 교체하는 정도에서 정치운영상의 책임을 전가하고 분열된 지배세력의 결속을 꾀했으나 지배층의 정권교체만으로는 당시의 심각한 현실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었다. 한편 청나라의 등장으로 중화주의적(中華主義的) 세계질서가 무너짐에 따라 새로운 대(對)중국관계의 정립이 불가피해졌으나 명분론·의리론을 내세운 집권층은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을 고수했다. 그 결과 이는 청과의 전쟁을 불러왔고, 종래의 사회적·정치적 과제를 더욱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정부지배층은 양전에 의한 전결(田結)의 확보와 조세원(租稅源)의 확대, 진폐전(陳廢田)의 개간, 대동법의 실시, 군역제의 이정 등 여러 가지 수습책을 내놓았는데, 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그런대로 국가체제를 유지해 갔다. 그러나 이런 대책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어서 적극적인 해결책이 모색되었고, 그러한 모색의 과정은 당시의 사상계가 주자와 주자학을 절대 신봉하고 여타의 사상을 용인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반주자적인 경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양명학·서학·천주교가 수용되고 실학·민중신앙이 발생하게 되었다.

반주자학으로서의 양명학

17세기의 조선 사상계 및 사회상황 속에서 양명학은 반주자학의 한 형태로서 중세를 탈피하고 근대를 지향한 사상체계의 의미를 가진다. 주자학이 '성즉리'(性卽理)의 논리를 통해 지배층 위주의 신분계급질서를 강조한 데 반해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의 논리로서 신분계급질서를 부정하고 평등을 지향했다. 조선사회에서는 중기에 이미 서경덕(徐敬德)에 의해 양명학이 수용되어 남언경·이요(李瑤)·허균(許筠)·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에게 전해졌으나, 주자학파는 양명학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철저히 배척했으므로 그 대부분이 양주음왕(陽朱陰王)의 형태로만 유지되었다. 그러나 정제두(鄭齊斗)에 이르러서는 반주자학의 논리로 수용되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고, 이광사(李匡師)·신대우(申大羽)·이건방(李建芳)·이건승(李建昇)·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으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강화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양명학은 종래 성리학이 형이상학적 이론과 이상을 추구한 데 반해 현실로 관심의 방향을 전환시켜갔다. 이에 따라 학문에 있어서는 선철(先哲)을 모방하는 태도로부터 자유로운 사고와 비판정신으로 이론과 실제를 일원화하는 실학사상의 발상을 보게 했으며, 이 현실지향적 사고방식을 통해 실학파들은 당시의 명분주의와 관념적 의리사상에 맞서게 되었다. 또한 양명학은 서학·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유발된 충격과 반발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즉 천주교 인사들은 양명학의 논점을 채용하여 동양사상과 서양의 천주교를 매개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양명학은 주자학 일변도의 조선 사상계에 새로운 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고 반주자적 학문의 싹을 심었다.

반주자학으로서의 서학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소개된 서학·천주교는 양란 후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외부적 요인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을 갈망하던 조선사회의 내재적 요청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자학 일변도의 엄격한 사상통제하에 있던 조선사회에서 서학의 수용 및 천주교의 전파는 반주자학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천주교가 가진 유교적 인륜질서, 신분제, 조선의 국가체제 등을 부정하는 측면은 그러한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었다. 서학은 주로 당쟁에서 밀려나 국가·사회 운영에 대한 개혁론들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있던 남인학자들에 의해 주목되었다. 이익(李瀷)은 많은 서학서적들을 읽고 그 과학기술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제자들과의 토론을 통해 천주교가 선유(先儒)의 상제사상(上帝思想)과 통하는 보유론적(補儒論的)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이해했다. 한편 그는 수용해야 할 부분과 배척해야 할 부분을 엄격히 구분했는데, 이러한 그의 태도에 따라 제자들은 서학을 적극 수용하고 신앙으로까지 발전시킨 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정약용 형제, 이벽(李蘗)·이가환(李家煥) 등 신서파(信西派)와, 서학을 비판하고 배척한 안정복(安鼎福)·신후담(愼後聃) 등 공서파로 갈라지게 된다. 서학의 수용은 전통적인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의 탈피, 주자학적 명분론의 비판을 가능하게 했으며, 천주교의 평등적 인간관은 주자학의 상하관계적 신분질서를 부정할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수용되었던 서학·천주교는 반주자학적 특성으로 인해 근대지향적·사회개혁적인 성격을 띤 종교로서 조선 후기의 사회에 확산되었다.

반주자학으로서의 실학

조선 후기의 실학은 주자학적 사상체계 내부로부터 발생하여 점차 그 사유방식을 탈피하면서, 원시유교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중세적 모순을 극복하고 근대사회를 전망하는 사회개혁사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양란으로 인한 위기상황에서 봉건지배층은 주자도통주의(朱子道統主義)에 입각하여 종래의 경국대전체제(經國大典體制)와 신분제(身分制)를 유지하고, 지주제를 중심으로 농업생산기반을 회복시킴으로써 중세 봉건 사회경제체제를 유지·강화시키고자 했다. 반면에 실학자들은 점차적인 신분제 부정의 방안을 제기하는 한편, 정전론(井田論)·균전론·한전론(限田論) 등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제를 해체·약화시키고 조선왕조를 소농경제의 기반 위에 탄탄하게 재건하려는 근본적인 개혁안을 제기했다.

대표적인 실학자로는 유형원(柳馨遠)을 들 수 있다. 그는 신분세습제와 노비세습제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함께, 지주제를 해체하고 그 토지를 국유화하여 균등하게 재분배함으로써 소농경제를 안정시키자는 균전론을 제기했다. 유형원의 토지개혁론을 계승한 이익·박지원(朴趾源)의 한전론, 홍대용(洪大容)의 균전론 등은 독립자영농, 자주적 소농경제의 안정을 궁극적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개혁안들은 19세기 들어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정약용은 '경자유전'의 원칙하에 토지를 국유화한 후, 농업생산을 촌락단위로 집단화·공동화하고 노동량에 따른 분배를 실시함으로써 중간수탈을 제거한다는 내용의 여전론(閭田論)을 제기했다. 또 정전제(井田制)에 상업적 농업을 접목하여 전국의 농업을 6과(科)의 전업적 농업으로 계획화하고 우수경영농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독립자영농민층 육성책인 정전론도 제기했는데, 이는 당시 발전하고 있던 상품화폐경제를 염두에 두고 사회적 분업과 상업적 농업을 전제로 자영소농민·소상품생산자의 육성을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봉건체제가 동요·해체되어가던 시기에 발생한 '조선 후기 실학'은 주자도통주의·지주적 입장에 서서 모순구조의 근본적 개혁 없이 운영상의 문제점만을 개선하고자 하는 정부지배층의 개량적인 입장과는 달리, 지주제를 해체시키고 소농경제를 안정시키며 기존의 신분구조에 부정적 견해를 제기하는 등 근본적 해결을 추구한 반주자학적 학문이며, 실천론이었다.

정약용(丁若鏞)

조선 후기 실학자

ⓒ S0ch1 / wikipedia | Public Domain

반주자학으로서의 민중신앙

현실사회의 모순에 불만을 느끼고, 무너져가는 신분질서 속에서 일제히 자각한 민중들의 개혁의지가 종래의 미륵신앙·정감록신앙·용신앙 등과 결합되면서 정치세력화하게 되었다. 이는 학문적으로 체계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반주자적 조류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미륵신앙(이 경우 下生信仰)은 18세기 이래 각종의 주술적·종교적·반왕조적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개인적인 구원의 차원을 떠나 기존의 권력구조 및 현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함으로써 다가올 이상사회를 준비하는 종교적 비밀결사운동으로 발전했으며, 고려시대 이래 민간신앙으로 전승된 지리도참사상과 정감록신앙이 반왕조적 무력집단을 조직하여 반봉건적 농민저항세력과 결합, 적극적 무력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이단사상의 등장은 사족(士族) 중심의 유교적 예교질서의 붕괴이며, 전통적 권위에 도전하는 민중의식의 자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정감록에는 조선왕조 해체기에 있어서 정치기강의 문란, 봉건적 수탈의 심화, 이로 인한 민생의 도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현실인식과 비판은 반봉건적 의식을 자각시켜주는 출발점이 되며, 이것이 어느 정도 사회개혁의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되고, 봉건적 신분질서에 대한 부정에 이르게 되면 왕조의 교체까지도 전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신앙은 19세기에 빈발한 농민항쟁과 정치변란, 여러 반역사건 등의 이념적 배경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민간신앙은 당시 조선사회의 제모순관계를 지양하려던 민중의 실천내용이 반영되어 있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갈래의 반주자학적 전통은 바로 해당 시기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봉건사회의 해체 과정을 촉진시키는 데 그 사상적 기반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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