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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소개된 서학·천주교는 양란 후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외부적 요인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을 갈망하던 조선사회의 내재적 요청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자학 일변도의 엄격한 사상통제하에 있던 조선사회에서 서학의 수용 및 천주교의 전파는 반주자학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천주교가 가진 유교적 인륜질서, 신분제, 조선의 국가체제 등을 부정하는 측면은 그러한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었다. 서학은 주로 당쟁에서 밀려나 국가·사회 운영에 대한 개혁론들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있던 남인학자들에 의해 주목되었다. 이익(李瀷)은 많은 서학서적들을 읽고 그 과학기술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제자들과의 토론을 통해 천주교가 선유(先儒)의 상제사상(上帝思想)과 통하는 보유론적(補儒論的)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이해했다. 한편 그는 수용해야 할 부분과 배척해야 할 부분을 엄격히 구분했는데, 이러한 그의 태도에 따라 제자들은 서학을 적극 수용하고 신앙으로까지 발전시킨 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정약용 형제, 이벽(李蘗)·이가환(李家煥) 등 신서파(信西派)와, 서학을 비판하고 배척한 안정복(安鼎福)·신후담(愼後聃) 등 공서파로 갈라지게 된다. 서학의 수용은 전통적인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의 탈피, 주자학적 명분론의 비판을 가능하게 했으며, 천주교의 평등적 인간관은 주자학의 상하관계적 신분질서를 부정할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수용되었던 서학·천주교는 반주자학적 특성으로 인해 근대지향적·사회개혁적인 성격을 띤 종교로서 조선 후기의 사회에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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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반주자학으로서의 서학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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