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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임진년·병자년의 양란을 겪은 후, 종래 조선사회를 이끌어왔던 지배이념인 주자학(朱子學)이 퇴색함에 따라 이를 대신할 새로운 사상체계로서 수용되거나 발생한 양명학(陽明學)·서학(西學)·실학(實學)·민중신앙(民衆信仰) 등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임진왜란, 병자호란).
17세기의 조선 사상계 및 사회상황 속에서 양명학은 반주자학의 한 형태로서 중세를 탈피하고 근대를 지향한 사상체계의 의미를 가진다. 주자학이 '성즉리'(性卽理)의 논리를 통해 지배층 위주의 신분계급질서를 강조한 데 반해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의 논리로서 신분계급질서를 부정하고 평등을 지향했다. 조선사회에서는 중기에 이미 서경덕(徐敬德)에 의해 양명학이 수용되어 남언경·이요(李瑤)·허균(許筠)·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에게 전해졌으나, 주자학파는 양명학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철저히 배척했으므로 그 대부분이 양주음왕(陽朱陰王)의 형태로만 유지되었다. 그러나 정제두(鄭齊斗)에 이르러서는 반주자학의 논리로 수용되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고, 이광사(李匡師)·신대우(申大羽)·이건방(李建芳)·이건승(李建昇)·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으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강화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양명학은 종래 성리학이 형이상학적 이론과 이상을 추구한 데 반해 현실로 관심의 방향을 전환시켜갔다. 이에 따라 학문에 있어서는 선철(先哲)을 모방하는 태도로부터 자유로운 사고와 비판정신으로 이론과 실제를 일원화하는 실학사상의 발상을 보게 했으며, 이 현실지향적 사고방식을 통해 실학파들은 당시의 명분주의와 관념적 의리사상에 맞서게 되었다. 또한 양명학은 서학·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유발된 충격과 반발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즉 천주교 인사들은 양명학의 논점을 채용하여 동양사상과 서양의 천주교를 매개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양명학은 주자학 일변도의 조선 사상계에 새로운 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고 반주자적 학문의 싹을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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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반주자학으로서의 양명학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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