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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왕의 운명이나 인사(人事)의 미래를 예언한 기록.
도와 참은 거의 같은 뜻이다.
도는 도서(圖書)·도화(圖畵)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실과 실물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추상적이고 함축적으로 미래의 일을 표시한 것이며, 참은 은밀한 말이나 문자로써 미래의 일을 예언 또는 암시하는 것이다. 뒷날 도와 참은 도참이라는 말로 연용되어 미래의 사상(事象), 특히 인간생활의 길흉화복·성쇠득실(盛衰得失)에 대한 징조 또는 예언이라는 뜻이 되었다. 또 복희(伏羲) 때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하도(河圖)의 도와 참이 합쳐진 말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도참을 참위서(讖緯書)라고도 한다.
위(緯)는 원래 경(經)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서 경에 근거하여 어떤 일을 서술하는 것이다. 위서(緯書)에는 음양오행·도참·상서(祥瑞)·재이(災異)·역운(歷運)·부명(符命) 등 신비한 요소가 많이 있으므로 위와 도참을 혼동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위와 도참을 연칭하여 도위·참위·위도·위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위서에는 도교와 관계되는 내용이 많다. 참위서는 예언을 포함한 경의 해석서로 볼 수 있는데 특히 점성술에 관계되는 문장이 많다. 참이 중심이 되는 것은 점성술이고, 위가 중심이 되는 것은 음양오행설이다.
참위설은 고대의 전설을 경서에 관련시킨 내용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참을 비결(秘訣)·비기(秘記)·비사(秘詞)·결(訣)이라고도 부른다.
도참사상의 성립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진한(秦漢)시대 방사류(方士類)의 예언자나 전한시대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에 입각한 금문학(今文學) 계열의 유학자들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것이 위서로서 종합·정리된 것은 후한 말엽으로 보인다.
참위서에 실린 사상은 BC 1세기말부터 성행했으나 예언을 믿는 경향은 꽤 이전부터 있었다. 시황제도 도참을 믿었으며, 참위는 전한 말기의 왕망(王莽) 이래 보편적으로 믿어져 후한의 광무제도 이를 신뢰했다. 후한의 명제와 장제(章帝) 때, 즉 1세기경에는 널리 신봉되어 유가들은 다투어 도참을 공부했는데, 정현(鄭玄)도 경서의 해석에 이를 응용했다. 그런데 도참은 신탁(神託)이나 하늘의 계시에 의하여 신비스럽고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미래기(未來記)로서 역성혁명기(易姓革命期)에는 물론, 기타 내우외환의 시국에 인심을 자극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도참은 정치운동이나 민중운동의 지도자들에 의해 원용되는 일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도참이 조작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이처럼 도참은 계시적 성격을 가지면서 종말론을 제시하는 데 그 특색이 있다. 그러므로 다분히 운명론적·결정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풍수와 연관된 도참이 많았다. 도참설이 부각된 것은 국민에게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을 지니게 되면서부터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660년(의자왕 20)에 신라와 백제의 흥망을 예언한 기록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도참이 본격화된 것은 신라말·고려초 이후이며, 특히 고려시대에는 풍수가 성행했으므로 풍수와 연관된 도참이 여러 기록에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도참이 금지되었다. 1417년 태종은 도참서의 유포와 소장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도참서를 불태웠으나, 여전히 정치적인 사변들과 관련되어 등장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풍수와 도참을 결합해 새로운 왕조의 출현을 예언한 도참서인 〈정감록 鄭鑑錄〉이 널리 유행했다.
도참설은 논리적 구조나 합리적인 설명 없이 결과를 제시하는 점에 특징이 있으며, 흔히 정치적 변혁기나 혼란기에 성행하여 집권세력 또는 반체제 세력의 민심 회유 수단이나 근거제공의 기능을 했다. 그러나 동학(東學)에서 보듯이 때로는 민심의 동향을 대변하는 구실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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