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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주자학은 그 체계가 완비되어 있어 수양과 실천을 위주로 할 뿐 이론적인 독창성이 없었다. 명나라 초기 진헌장은 독서에 의한 자기수련법을 버리고 정좌를 통해 사색한 끝에 심학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헌장의 심학은 양명학의 선구가 되었으며, 심학은 왕수인에 의해 대성되었다. 왕수인은 "심은 곧 이이다. 천하에 심외의 일이 있고, 심외의 이가 있겠는가"라는 주체적인 자각에서 심즉리가 정립되었다고 했다. 그는 지행합일설을 주장하고, 저양 이후 정좌를 가르쳤으며, 강우 이래로 비로소 치양지 3글자를 제시하여 본체를 바로 지적했다. 흔히 왕수인의 교가 삼변했다고 하는데, 이는 지행합일설-정좌-치양지설로의 변화를 말한다. 양명학은 심즉리로부터 출발하여 지행합일설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치양지설에 의해 완성된다.
양명학의 형성
주자학은 그 체계가 완비되어 있어 원나라 때부터 수양과 실천을 위주로 할 뿐 이론적인 독창성이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 초기 진헌장(陳獻章)은 독서에 의한 자기수련방법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서를 버리고 정좌(靜坐)를 통하여 사색한 끝에 '곳을 따라서 천리를 체인(體認)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문인 임광(林光)은 진헌장에 대해서 "선생께서 교육할 시초에 반드시 정좌케 하여 그 착한 실마리를 기르게 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하는 까닭은 도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도(道)를 서적에서 찾으나 얻지 못하니 도리를 내 마음에서 찾는 것이 옳겠다'라고 했다." 이로써 진헌장의 심학(心學)은 양명학의 선구가 되었다. 왕수인은 저장 성[浙江省] 위야오 현[餘姚縣]에서 태어났으며, 젊어서는 많은 정신적 편력이 있었다. 그는 용장(龍場)으로 귀양가서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만으로 스스로 넉넉하다. 따라서 밖으로 찾을 것이 아니다"라고 자각하게 되었다. 또 주자의 즉물궁리(卽物窮理)는 심(心)과 이(理)의 간격을 좁힐 수가 없으므로 격물(格物)의 격(格)을 주자처럼 '이르다'[至]로 해석하지 않고, 바로잡는다[正]로 했으며, 물(物)을 주자처럼 사물의 이라 하지 않고, 심의(心意)가 있는 인간사(人間事)라고 해석했다.
즉 심의 발동의 부정(不正)을 바루는 것[正]을 격물이라고 했으며, 치지(致知)의 지는 지식이 아니라 양지(良知)이니 양지를 수렴하여 확충하고 실현하는 것을 치지라고 했다. 그리하여 심즉리(心卽理)에 귀착하게 되었다. 뒷날 왕수인이 성인의 학문은 심학(心學)이라고 했듯이, 심학이 체계화되는 기초가 여기서 마련되었다. 한편 구이양[貴陽]에 있을 때, 처음으로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하고, 저양(檍陽) 이후 정좌를 가르쳤으며, 강우 이래로 비로소 치양지(致良知) 세 글자를 제시하여 본체를 바로 지적했다.
흔히 왕수인의 교(敎)가 삼변(三變)했다고 하는데, 이는 지행합일설 - 정좌 - 치양지설로의 변화를 말한다. 지행의 본체는 심이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양지(良知)이기 때문에 지식과 실천이 심에 의하여 합일된다고 했지만 실천과 지식의 합일을 위하여 정좌공부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한때는 배우는 자가 깨우치는 듯했으나 오래됨에 따라 점차 고요한 것을 즐기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폐단이 발생해 치양지공부(致良知工夫)로서 그 폐단을 타파했다.
이처럼 양명학은 치양지설에서 체계가 완성되었다.
원리
심즉리로부터 출발하여 지행합일설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치양지설에 의하여 완성된다.
심즉리
새로운 격물치지설을 주장하게 된 원리는 심즉리이다.
이는 육상산(陸象山)에서 발견된 심학의 원리이기도 하다(육왕학파). 그러나 심학은 왕수인에 의해 대성되었다. 그는 "심은 곧 이이다. 천하에 심외(心外)의 일이 있고, 심외의 이가 있겠는가"라는 주체적인 자각에서 심즉리가 정립되었다고 했다. 심외에 사물이 없고, 심외에 일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객관적인 외계(外界)의 사물은 마음을 떠나면 소멸해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가 남진(南鎭) 땅에서 바위 위에 핀 꽃을 보고, "저 꽃은 스스로 피고 스스로 떨어지니 우리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질문했을 때, 왕수인은 "당신이 이 꽃을 보지 못했을 때는 이 꽃은 당신의 마음과 함께 고요했다.
그러나 당신이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 이 꽃은 빛깔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 꽃은 당신의 마음 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사람에게 의식되지 않을 때 그 꽃은 고요히 그대로 있었지만, 사람이 의식했을 때 비로소 아름답다·분홍이다·빨갛다 등의 평가와 판단으로 인하여 꽃은 꽃노릇을 하게 된다.
사물은 인간의 의식과의 관계에서 그 가치가 주어지고 세계질서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마음 외에 사물은 없다'는 근본 뜻이다. 그러나 치양지설을 주장한 후부터 이보다 심에 중심이 옮겨졌다. 즉 심의 외화(外化)가 곧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것으로 사물현상은 심의 현상물이라 했다.
지행합일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은 지(知)에 속하고 아름다운 꽃을 좋아하는 것은 행(行)에 속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는 이미 좋아하는 것이지 먼저 보고 난 뒤에 또다른 마음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왕수인이 지는 행의 시작이요, 행은 지의 완성이라고 했던 까닭이다. 즉 우리의 지식과 실천은 본래 합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린(賀麟)은 지행합일신론(知行合一新論)에서 대략 "지는 의식활동이며, 행은 생리적인 활동이다. 지행이 비록 성질이 다른 활동이라고 하더라도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합치한다.
우리의 의식활동은 생리적 조건과 물질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이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므로 지행합일이라고 한 것이다. 의식활동과 생리적인 활동은 동시에 발동되며, 시간적인 선후가 없다"고 했다.
치양지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지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양지이다.
왕수인은 49세 때에 치양지설을 주장했다. 치양지설이 창안된 뒤부터는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보존한다는 등의 수양방법보다 오히려 양지의 실현이 중시된다. 양지를 실현한다면 모든 사사로운 폐단이 스스로 소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을 바룬다', '사욕을 버린다'고 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치양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왕수인은 양지의 두 글자가 참으로 성인되는 학문의 바른 법이요 안장(眼藏)이라고 했다.
치양지설 이후부터 사상마련설(事上磨鍊說)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것이 치양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치양지는 일상생활에서 때와 곳을 따라 정당한 실천이 요구된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일들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양지에 따른 판단과 처리가 있어야 하고, 이러한 요구들은 즉결(卽決)을 요하는 것이니, 정좌하여 명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왕수인은 천군만마(千軍萬馬)의 전쟁터에서 즉결이 요구되는 실지체험을 했기 때문에 사상마련이라고 하는 양지발현의 수단방법이 발상되었다.
치양지의 수단으로, 그의 만년부터 정좌에 의존하거나 독서에 의존하는 수양법을 버렸던 까닭에 사상마련법이 발견되었다. 또 대동(大同)의 인(仁)을 실현하기 위해 천지만물 일체의 인인 본체가 내 본연이요, 양치인 것을 철저히 깨우쳐서, 공리(空理)와 기능적 지식이 그것을 막고 어둡게 하는 줄을 알아서 이를 근본·근원부터 뽑아버리며 막자는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을 주장했다.
천하를 보되 한 집처럼 하고, 중국 보기를 한 사람과 같이 한다는 대동주의(大同主義)는 왕수인의 가장 만년 저술인 〈대학문 大學問〉의 간절한 주장이다.
조선의 양명학
수용
양명학의 동전(東傳)에 대하여, 1558년(명종 13)에 유성룡(柳成龍)이 17세 때, 의주(義州)로 돌아온 사은사 심통원(沈通源)이 압록강변에 버린 짐짝에서 양명집을 얻어 베껴 두었다고 했으므로 이해에 처음 양명학이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눌재집 訥齋集〉 연보(年譜)에 박상(朴祥)이 48세(1521)에 "왕양명의 전습록을 변론한다"고 한 것이 있고, 김세필(金世弼)도 〈십청헌집 十淸軒集〉에서 "양명 노선생이 심학을 다스렸다"고 했으니, 이를 볼 때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에 있었는데, 양명연보(陽明年譜)에 의하면 "이해에 선생이 비로소 치양지의 교(敎)를 내어 걸었다"고 했다.
왕수인은 그해에 진구천(陳九川)에게 "양지 두 글자는 참으로 천고성현(千古聖賢)이 서로 전수한 한 점의 골혈(骨血)이다"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양명학에 대한 논의는 이와 같이 왕수인이 생존시에 일어났던 일이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황(李滉)에게 불교적이라고 배척되었으며, 유희춘(柳希春)·유성룡·박세채(朴世采)·한원진(韓元震) 등에 의해 계속해서 배척받았다.
하지만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에 의하여 수용(受容)되어 정제두(鄭齊斗)에 의하여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이종휘(李鍾徽)·이광사(李匡師)·이충익(李忠翊)·정동유(鄭東愈)·이건창(李建昌)·이건방(李建芳)·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 등으로 계승·발전되었다.
조선의 양명학파
조선 양명학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주자학의 무력함을 자각하여 실용적인 실학과 함께 역동적인 양명학이 일부 학자에 의하여 연구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실학파의 선구인 이수광·허균 등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양명학설이 수용되고 심학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셋째, 양명좌파의 이탁오(李卓吾) 등의 문학이론이 허균·박지원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넷째, 특히 진(眞)과 가(假)의 분별이 강조되어 가도학·가대의·가인 등으로 가가 배격되었다. 왕수인이 "이 양지를 투철히 이해한다면 천만 가지의 말을 하더라도, 옳고 그름과 성(誠)·위(僞)가 그 앞에 오면 곧 분명해질 것이다.
그의 양지에 맞으면 옳고, 들어맞지 아니하면 그른 것이다"고 한 것에서 그들이 순진무가(純眞無假)를 추구하는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조선을 대표하는 양명학자는 정제두·이충익·이건방 등을 들 수 있다.
정제두의 양지체용도(良知體用圖)
정제두는 양지를 체와 용으로 구분하여 양지체용도를 만들었다.
체(體)는 양지의 체요, 용(用)은 양지의 용이다. 성(性)은 심의 본연이요, 양지의 체이다. 정(情)은 심의 발이요, 양지의 용이다. 이와 같이 성과 정으로써 양지의 체와 용으로 구별했으며, 천지만물도 마음 속의 일이며 물아(物我)·내외(內外)가 모두 심이라고 보았다. 양지의 영명(靈明)한 체로 말한다면 제(帝)요, 그 지각하는 용으로 말한다면 만물을 화육함[化工]이니 곧 하나의 마음으로서 하는 말이다. 양지의 본체는 미발(未發)이며 중(中)이요, 양지의 용은 이발(已發)이요 정이며, 선을 알고, 악을 아는 지라고 했다.
다음과 같은 정제두의 고백은 양지학의 폐단이 혹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양명집을 살핌에 그의 도가 간요하면서도 몹시 정미했으므로 마음 속으로 기뻐하고 좋아했다. 신해(辛亥, 1671) 6월에 동호(東湖)로 가서 일박했다. 꿈 속에서 갑자기 왕씨의 치양지학이 몹시 정밀하지만 또한 폐단이 있어 감정대로 하고 욕(欲)에 좇을 근심이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각은 양명좌파의 정욕긍정적 폐단을 말한 것이니, 그의 양명학은 자연 양명우파, 내지 정통파와 연결된다.
그의 손서인 이광명(李匡明)은 이충익의 양부(養父)이며 이충익은 이건창과 이건방의 5대조(五代祖)이다.
이충익의 가설
이충익은 그의 〈초원유고 椒園遺稿〉의 가설 상하편(上下編)에서 "처음의 가를 어찌 스스로 그것이 가임을 모를까. 오직 그것이 오래되면 처음의 가를 잊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이것을 사용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습이 형성되면 양지는 말살된다고 했다.
또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횡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공격한다. "속으로 칼과 칼날을 맞내이나 겉으로는 노린내나는 골로 달리며, 나와서는 찡그렸다 폈다 하면서 공맹(孔孟)은 세상을 구제하기가 급했다 하고, 교만하게 스승의 도가 그렇다고 한다…… 온 세상사람의 입을 막고, 언론의 자유를 속박할 뿐만 아니라, 항의도 할 수 없게 한다.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지 못하고서 그들의 하는 바를 예뻐하고 본받아 배우며 오직 못났다고 두려워하면서 물끄러미 보고 즐겁게 무리가 되어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고 하여 노론(老論)의 전제주의를 비판했다.
이건방의 원론(原論)
이건방은 이충익의 고손으로 그의 〈원론〉 상·중·하와 〈속원론 續原論〉을 보면, "이른바 도와 의(義)는 반드시 참된 도와 의가 아니다.
만약 가심으로부터 나와서 높은 이름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도를 도적질하고, 의를 해침에 알맞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 송시열당의 가대의설을 다음과 같이 공격했다. "우리나라 중엽에 한 큰 선비가 있었는데, 처음 나올 때는 총명하고 글을 잘하여 넉넉히 사람을 감동케 하고 나라가 무사할 때를 만나 유술(儒術)을 높이고 권장하여 배우는 것이 조광조·이황·성혼·이이의 뒤를 이어 오로지 정주(程朱)를 숭상하여 그 반대론자를 물리쳤다.……헛된 이름이 융숭하니 흡족하고, 지위가 날로 높아지니 굳게 자기에게 붙는 자와 결탁하여 당파를 만들어서 자기에게 붙지 않는 자를 배척하여 그 말이 조금이라도 다른 자라면 반드시 주자(朱子)를 끌어다가 그 말을 꾸며서 이를 공격하되 주자를 배반한 죄인으로 삼았다." 그는 주자를 이용하여 반대파를 말살한 송시열의 행동을 두고 가주자학도·가춘추대의론자라고 공격했다.
이는 양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모두 가라고 한 이들 조선 양명학자의 특색을 짐작하게 한다.
성령주의 시문
성령주의(性靈主義)는 도문일치(道文一致)를 주장한 고문파(古文派)를 반대하고 개성주의적 문학을 주장한 이탁오의 동심설(童心說)을 기폭제로 하여 원중랑(袁中郞)의 공안파(公安派) 문학이론이 되었다.
이러한 문학정신은 우리나라의 허균·박지원·박세당(朴世堂)으로 이어졌다. 박세당은 "문득 사람의 성령(性靈)을 증가한다"고 했으며, 정제두의 문인 신대우(申大羽)는 이광려(李匡呂)에 대하여 "그 문장은 성령을 발휘하여 충원(沖遠)함을 이루었다"라고 했다.
또한 이충익도 〈이참봉집발 李參奉集跋〉에서 "문장을 지을 때 앞 사람들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시세(時世)에 구애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한 것은 즉 문장형식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탁오가 "동심에 감동된 것이 있다면 스스로 문장이 된다"하고, 원굉도(袁宏道)가 "홀로 성령을 서술하되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의 가슴 속으로부터 흘러나지 않는다면 붓을 들지 않는다"고 한 것이 바로 성령주의 문학정신이다.
성령주의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말한 문학정신에도 나타나며 김정희(金正喜), 문인 장지완(張之琓), 최성환(崔瑆煥)·정수동(鄭壽銅) 등 중인층으로 확산되었다. 장지완은 시라는 것은 도사성령(陶寫性靈)이라고 했고 최성환은 방대한 〈성령집 性靈集〉이라는 시평문을 편집하여 "근체시(近體詩)가 성령을 얻음에 가장 가까운 까닭이다"하고, "성령을 오로지 하고, 격조를 뒤로 미루며 기백을 버리기로 했다"고 했으며, 정수동도 "가장 영롱한 곳에 성령이 나타나며, 깊은 공부를 쌓지 않고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것은 김정희의 "시인은 자기의 성령에 가까운 것을 따를 일이요, 한 가지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한 성령에 근거한 것이다.
성령주의란 양명학 좌파의 이탁오의 영향을 받는 공안파의 문학이론인데, 이러한 문예사조가 우리나라의 양명학 수용과 함께 다른 학파에까지 파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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