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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조선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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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지배하에 있던 고려는 1368년공민왕 17명의 건국으로 내부적으로 친명·친원의 2파로 갈려 분명한 외교노선을 견지하지 못했는데, 이는 원나라를 배경으로 한 권문세족과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려는 신흥사대부층의 대립의 반영이기도 했다. 공민왕은 즉위와 더불어 친원세력을 배격하고 실지(失地)의 일부를 회복하는 등 진취적인 정책을 실시하다가, 결국 원의 압력으로 중단했다.

그러나 1369년 명의 개국을 알리는 사신을 접대했고, 1370년 원의 연호인 지정(至正)을 폐지하고 명의 연호인 홍무(洪武)를 사용하기로 했으며, 이성계를 보내어 동녕부를 공격, 사실상 원과 절교하게 되었다. 한편 원의 잔여세력이 건국한 북원은 여전히 고려에 압력을 가해왔으며,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권력을 장악한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친원파로서 북원과의 관계를 회복시켰으며, 명나라 사신 채빈을 살해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명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고려는 북원과 명나라에 이중외교를 전개했는데, 1385년 명이 고려와의 통교를 알리고 공민왕에게 시호를 추증하는 등 양국관계는 정착되어갔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명에 대해 사대로서 친선을 유지해가려 했다. 신흥사대부층의 지지를 받은 이성계가 당시 권문세족과의 투쟁에서 내세웠던 친명정책은 조선왕조 건국 후에도 필요했다. 명에 대한 사대는 조선의 왕이 명의 책봉을 받고 그 연호를 사용하며, 중요한 국정을 보고하여 그 의견을 듣는 따위의 일을 말한다.

이에 대해 조선은 정치상 기본적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조공에 따르는 관무역으로 이득을 얻고, 선진문화를 수입했으며, 정권의 국제적 승인이라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따라서 조공의 횟수에 있어서 명은 3년에 1공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1년에 3공을 주장하여 2가지가 얽혀서 실시되었다. 조선과 명과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한 편이었으나, 건국 초기에는 고명·인신(印信)의 문제, 환관·처녀의 진헌문제, 종계변무(宗系辨誣) 등의 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종계변무문제는 〈대명회전〉에 조선 태조가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해달라는 요청으로 약 200년을 끈 다음 선조 때에 이르러서야 해결되었다. 또한 명에서 제정된 명률은 조선 초기 〈대명률직해〉로 번역되어, 〈경국대전〉의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상면에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17세기 만주족이 흥기하여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건국하자, 조선은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를 표방하여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청으로부터의 침략을 받았다.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

명나라에 쳐들어오는 후금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이 군대를 보낸 전투(광해군)

ⓒ Andres rojas22/wikipedia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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