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08. 7. 13, 프랑스 쉴리 |
---|---|
사망 | 1893. 10. 17, 루아레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육군원수, 제3공화정의 2대 대통령.
Duc de Magenta라고도 함.
그의 대통령 임기 동안 신헌법(1875)이 채택되고 행정부와 입법부의 관계를 규정짓는 주요선례들이 확립되는 등 제3공화정의 기본골격이 갖추어졌다.
스튜어트 왕조시대에 프랑스로 도피한 아일랜드인의 후손으로 1827년 알제리에서 군생활을 시작해 콩스탕틴 공세(1837)와 크림 전쟁(1853~56)에서 위용을 떨쳤다. 군경력의 절정을 이룬 것은 이탈리아 전투에서였는데, 마젠타의 혁혁한 승리로 '마젠타 공'이라는 작위를 받게 되었다. 1864년 알제리 총독으로 부임했으며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 때는 알자스에서 제1군을 지휘했으나 부상을 입고 뵈르트에서 패퇴했다. 스당에서 잠시 요양한 뒤 베르사유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871년 5월 파리 코뮌을 진압했다.
1873년 5월 24일 제1대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가 의회의 불신임 결의에 의해 사퇴하자 왕당파는 마크 마옹을 대통령으로 지목했고 그날 밤 심야회의에서 제3공화정의 2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대중 앞에 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당시의 복잡한 정치상황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마크 마옹은 처음부터 마지못해 대통령직을 수락했다. 1873년 11월 20일 가결된 대통령선거법(세프테나트 법)은 마크 마옹 대통령에게 7년의 임기를 부여했다.
1875년 신헌법이 공표되고 이듬해 국민의회가 해산됨과 동시에 총선이 실시되었지만 공화파 의원들이 대거 복귀하는 결과를 낳았다. 최초의 위기는 12월 하원이 온건 공화주의자 쥘 시몽을 총리로 영입하자 발생했다.(→ 시몽) 왕당파와 교권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원은 시몽이 몇몇 우파 관료들을 축출했다는 이유를 들어 총리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했고 1877년 5월 16일('5월 쿠데타') 대통령은 파면장이나 다름없는 서한을 쥘 시몽에게 발송했다. 총리의 사임은 5월 위기를 가속화했고 6월 25일 마크 마옹이 왕당파의 거두인 알베르 드 브로이 공에게 조각을 위촉하고 상원이 대통령의 하원 해산요구를 가결시키자 "도대체 프랑스 정부가 책임을 지는 대상은 대통령인가 의회인가?"라는 문제가 정가를 떠들썩하게 했다.
1877년 10월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과 관선입후보제에도 불구하고 과반수인 326명의 공화주의자들이 하원에 진출했으며 드 브로이 내각에 대해 즉시 불신임결의안을 제출했다. 마크 마옹은 로슈부에 내각마저 단명하고 말았을 때 온건파인 쥘 뒤포르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파 내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1877. 12. 13). 1879년 1월의 총선으로 공화파의 세력이 상원을 가늠하게 되고 정부가 공화정에 반대하는 9명의 장군을 면직시키려 하자 1월 28일 마젠타 공은 대통령직에서 사퇴했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있었던 헌정상의 위기는 대통령에 대한 의회의 우위를 확인했으며 그결과 제3공화정의 대통령은 입헌군주와 같은 형식적인 지위로 권한이 축소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대통령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