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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여 1871년 2월 프로이센과의 평화조약을 위해 소집된 국민의회에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하자 파리 시민은 왕정 부활을 염려하여 국민방위군을 무장해제시키려 하자 저항을 일으켜 코뮌 정부를 수립했다.
리옹·생테티엔·마르세유·툴루즈 등지에서 일어난 코뮌은 곧바로 진압되었으므로 파리 코뮌은 홀로 베르사유 정부와 맞서야 했다.
군사조직을 갖추지 못한 코뮌 병사들은 정규에 진압당했다. 코뮌이 와해된 뒤 정부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여 약 3만 8,000명을 체포하고 7,000명 이상을 추방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와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1852~70)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871년 2월 프로이센과의 평화조약을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국민의회는 지방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했다. 공화주의적인 파리 사람들은 베르사유에서 열리는 국민의회가 왕정을 부활시키지 않을까 염려했다. 임시 국민정부의 행정 수반을 맡고 있던 아돌프 티에르는 파리의 질서유지를 위해 국민방위군(주로 파리 포위전 때 싸운 노동자들로 이루어짐)을 무장해제시키기로 결정했다.
3월 18일 시(市) 수비대의 대포들을 치우려 하자 파리에서 저항이 일어났다. 그뒤 3월 26일 수비대 중앙위원회가 조직한 자치선거에서 혁명파가 승리했고 이들은 코뮌 정부를 세웠다. 새 정부에는 자코뱅파와 사회주의자들인 프루동파, 블랑키파 등이 있었다. 자코뱅파는 1793년 혁명의 전통에 따라 파리 코뮌이 혁명을 주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루동파는 전국에 걸친 코뮌의 연합을 주장했으며 블랑키파는 폭력혁명을 요구했다.
내부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코뮌이 채택한 강령은 1793년을 연상시키는 조치들(종교에 대한 지원 폐지, 혁명력 사용)과 제한된 사회개혁조치(10시간 노동, 제빵공의 야근 철폐)를 추구했다. 리옹·생테티엔·마르세유·툴루즈 등지에서 일어난 코뮌은 곧바로 진압되었으므로 파리 코뮌은 홀로 베르사유 정부와 맞서야 했다. 그러나 코뮌 병사(Fédéré)들은 군사조직을 갖추지 못해 공세를 취할 수가 없었고, 5월 21일 정부군이 방비가 없는 곳을 통해 파리로 들어왔다(→ 코뮈나르).
뒤따른 피의 일주일(la semaine sanglante) 동안 정규군은 코뮌의 반발을 진압했다. 반란자들은 방어를 위해 길에 방책을 치고 공공건물(그중에는 튈르리 궁전과 시청 건물이 있었음)에 불을 질렀다. 반란자들 약 2만 명과 정부군 750명가량이 죽었다. 코뮌이 와해된 뒤 정부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여 약 3만 8,000명을 체포하고 7,000명 이상을 추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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