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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레앙

다른 표기 언어 Gaston (-Jean-Baptiste), duc d'Orlé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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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08. 4. 25, 프랑스 퐁텐블로
사망 1660. 2. 2, 블루아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왕족.
duc d'Anjou라고도 함. 별칭은 Gaston de France, Monsieur.

형인 국왕 루이 13세(1610~43 재위)와 미성년인 조카 루이 14세(1643~1715 재위)의 통치 동안 내각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몇 차례의 음모와 반란을 지지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앙리 4세(1589~1610 재위)와 마리 드 메디시스의 셋째 아들로, 처음에는 앙주 공작으로 알려졌다.

1611년까지는 루이 13세의 살아남은 유일한 형제로서 '므시외'(각하)라고 불렸다. 처음으로 왕실의 권위와 충돌한 것은 1626년 마리 드 메디시스와 루이 13세의 막강한 총리인 리슐리외 추기경이 마리 드 부르봉 몽팡시에와 그를 강제로 결혼시키려고 했을 때였다. 셰브뢰즈 공작부인과 그녀의 애인 샬레 후작을 포함한 몇몇 귀족들이 이 결혼에 반대하도록 그를 부추기며 리슐리외 암살 음모에 끌어들였다. 리슐리외는 이 음모를 적발해 샬레를 처형했다. 그러나 앙주는 왕위 계승권이 있는 상속자였기 때문에 기소를 면했다.

1626년 8월 시키는 대로 결혼해 3번째 오를레앙 가문의 첫번째 오를레앙 공작이 되었다. 9개월 뒤 그의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1631년 마리 드 메디시스가 리슐리외를 해임시킬 것을 요구하다가 국왕에 의해 파리에서 추방당하자 오를레앙은 대비를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로렌 공작 샤를 4세의 누이인 로렌 마르그리트의 공작령으로 도망쳤다. 며칠 뒤 루이 13세의 군대가 로렌으로 쳐들어오자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도망갔다가 랑그도크 총독인 실력자 몽모랑시 공작이 이끄는 반란에 합세하기 위해 소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7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반란이 진압된 뒤 오를레앙은 사면을 받았으나 11월에 몽모랑시가 처형당하자 그는 다시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달아났다. 리슐리외는 1634년 그에게 프랑스로 돌아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오를레앙은 1636년 루이 13세를 위해 피카르디에서 스페인에 맞서 싸웠으나 왕은 여전히 그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승인하지 않았다. 1638년 왕세자 루이(뒤에 국왕 루이 14세)가 탄생하자 왕위를 계승하려던 그의 희망이 무너졌다. 그는 리슐리외를 제거하려던 생 마르 후작의 음모(1642)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져 더욱더 굴욕스러운 처지가 되었다.

어린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르자 루이 13세의 유언에 따라 오를레앙은 국왕의 대리관이 되었다. 대비인 오스트리아의 안나가 유일한 섭정이 되도록 도왔으나 그녀는 리슐리외의 부하인 쥘 마자랭 추기경을 총리로 임명했다. 1648년 프롱드의 난으로 알려진 귀족 반란이 일어나자 마자랭을 지지하다가 1651년, 안나에게 마자랭을 해임하도록 압력을 넣은 왕족 연합에 가담했다. 1652년 정부군이 다시 파리를 장악했을 때 루이 14세에 의해 추방당했다가 4년 뒤에 공식적으로 왕과 화해했다.

그의 〈회고록 Mémoires〉은 1683년에 출판되었고 G. 드탕의 〈가스통 오를레앙 Gaston d'Orléans〉이 1959년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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